2010년 3월 22일 월요일

종이의 발명 - 채륜

 

. MBC tv - Documentary

http://www.mbclife.co.kr/program/program_main.asp?num=39

 

 

 

고대중국 진시황의 [-주.1 참조-] 분서갱유(焚書坑儒, BC 212년) 으로
대나무로 만든 모든 죽간(각종 서류와 서적)들이 불길 속에 던져지고
그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점차 복잡해지는 모든 행정 절차의 기록과
사상의 전수에 대한 필요성에 의해 착수하기 시작한 종이의 발견
과정은 기원 107년 중국의 채륜이라는 환관이 황후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17여년 각고의 노력 끝에 나무껍질의 식물섬유를
이용한 역사적인 종이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이후 300여년의 기간을 거쳐 점차 종이는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알리는 중요한 정보전달 매체로 자리 잡아 갔으며, 한국,일본 등
주변국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종이를 이용한 서적과 관련된 고사성어로 [-주.2 참조 -]

낙양지귀(洛陽紙貴) 란 말이 있다.

 

이는 베스트셀러와 비슷한 말인데, 잘 팔리는 책으로 인해 종이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 졌음은 그 당시에서도 당연해졌음은 물론이다.

 

이후 종이는 점차 실크로드를 통해 서방으로 전파되었으며, 전
세계를 서에서 동으로 한 바퀴 돌아 서구의 대량적이며 기계적으로
더욱 승화된 종이 문화로 다시 중국으로 귀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까지 채륜의 생산방식을 답습한 중국의 종이 생산자들은
전통의 한지를 계속 만들어 오고 있는데 지질은 상당히 훌룡하다고
한다.

 

한지의 생산으로 인해 사람의 생각과 경험 그리고 각종 기록은
쉽고 복잡하게 그림과 문자를 통해 후세나 다른 이들에게 전파되었으며
종이가 문명에 끼친 영향력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일임은 분명하나
종이가 생겨남으로써 각종 훌룡한 서체가 창제되어 후학들에게 계승
발전되었음은 대단한 성과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왕희지는 중국 당대의 서예의 성인이란 칭호에 걸맞게
기막힌 문재로 행서 및 초서의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고히 확립하였다.
 

주.1) 분서갱유 :

각종 유가 책들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일로서,
본래 상앙(商) ·한비자(韓非子) 등의 법가(法家)는 우민 정책과
법에 의한 획일적인 사회 통제를 주장하기 때문에 법치 노선을
비판할 수 있는 일체의 학문과 사상을 배격하였으며, 특히
선왕 도를 내세워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儒家)를 배척하였다.

 

진(秦)나라는 상앙 변법 이래 법치 노선을 견지하지만
천하 통일 이후에도 이 정책은 변하지 않았는데,
시황(始皇) 34년(BC 213년) 유생이 진제국의 철저한
군현제 강행을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함으로써
불행한 사태가 시작되었다.

 

시황제는 일단 그 의견을 조정의 공론에 붙였으나,
철저한 법가로 일관한 승상 이사(李斯)는 그에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제에 사적인 학문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본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진기 이외의 사서는 모두 불태우고, 《시》 《서》 백가어를
수장한 자는 30일 이내에 모두 관에 신고하여 불태우되
이를 어긴 자는 관노 성단(城旦)으로 삼으며,
감히 《시》 《서》를 논한 자는 기시(棄市)에 처하고,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 정치를 비방한 자는 족형(族刑)에
처할 것, 단 의약 ·점복 ·농업 관계 서적은 제외할 것을
건의하자, 시황제는 이를 재가하였다.

 

이듬해(BC 212년)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하는데
실패한 방사(方士)들이 달아나자, 시황제는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을 체포하여 결국 460여 명이 구덩이에 매장되는
형을 받았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시황제의 분서갱유인데,
처형 규모도 크지 않고 실제 유생이라기보다는 사기성이 농후한
일부 방사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유가(儒家) 탄압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 분서도 그 실제적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제국에서 유가가 환영받지 못한 것은 명백하며,
한제국이 BC 191년 새삼 ‘협서율(挾書律:금서 소지를 금하는 법)’을
폐지할 때까지 원칙상 유가의 고전이 자유롭게 학습될 수 없었던
사건으로, 유가가 일시나마 위축시킨 사건임은 확실하다.

 

주.2) 낙양지귀
http://korean.cri.cn/chinaabc/chapter16/chapter160411.htm
http://user.chollian.net/~jjs5049/ga/na1.htm

 

. 종이의 기원
http://wjhanji.co.kr/intro/intro.php?p=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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