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5일 토요일

[독일사]-로마제국과 게르만족의 질긴 인연

독일을 정식으로 통일한 것은 고.중대를 훌쩍 뛰어넘어 근대 이후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였다.

 

언제나 서유럽과 동유럽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양쪽의 세력 간 투쟁의 전장터가 되기 일쑤였으며 숱하게 침투해 들어오는 여러 문명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면서 많은 템퍼러리 같은 버퍼 역할을 수행해 온 나라가 바로 독일이었으며 게르만 족이었다.

 

그러나 독일땅 위로 얼마나 많은 민족과 부족들이 스쳐가면서 역사를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규정할 수 없겠지만 존재한 것은 분명했다.

 

근대 이후의 독일제국을 제외하곤 언제나 변변한 수도도 없이 수많은 부족들로 분권화되어 제각기 살아온 부족인 게르만 족 ~!

 

초반의 독일사는 그래서 참으로 다루기 어렵다.

 

대체적으로 게르만족은 청동기 시대 이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남부에서

유틀란트 반도, 북부 독일 지역에 걸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원전 4 C  ~ 3 C 무렵 경 게르만 민족은

처음으로 역사에 윤곽을 나타내게 된다.

 

이들은 혈통적이라기보다는 경제·사회·문화적 발전에 따른

복속과 통합 과정으로 인해 생겼으로 처음엔 부족연맹체로써 역사에 드러냈다.

 

바이에른족, 알레마니족, 프랑켄족, 튀링겐족, 프리젠족, 작센족 등,
동일한 부족에 속하는 사람들은 관습·종교·문화·법적 전통을 갖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혈족명으로 다른 부족과 구별하였다.

 

그러나 초기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정확한 생성과 소멸은 알 수 없다.


한 부족과 다른 부족을 구분짓는 종족적 특징들이 반드시 지속되거나

제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족간 합병이나 분할도 빈번한 형편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점차 춥고 비가 자주오며

땅이 척박한 라인강 북부에서 기온이 온화하고 문명이 발달한

지중해 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

살고 있던 켈트족을 내쫓고 동남쪽으로는 흑해 연안, 서남쪽으로는

라인 강과 다뉴브 강 유역까지 뻗어나가 결국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는

고도문명의 로마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게르만인은 게르마니아의 각 지역에서는 이미 2세기 말경부터

독자적인 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랜 정치적 통합인 키비타스(civitas)가 점차 붕괴되고
이에 대신하는 보다 큰 몇 개의 슈탐(stamm), 즉 부족집단이 나타나
이것이 단위가 되어 멀리 동방 또는 남방으로의 이동이 활발해졌다.

 

동·서고트족이 때마침 훈족과 접촉하게 된 것은 그들이 발트해(海) 연안으로부터
2세기 말에 이동을 시작해 정착과 이동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남동쪽으로 내려가 4세기에 이르러 드네프르·다뉴브 두 강을 사이에 두고
흑해 북쪽 연안 일대에서 동고트와 서고트로 분리되어 정착하였다.

 

이동집단의 단위인 슈탐은 그게 다음 3가지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이동 전(前) 게르마니아 동부의 동게르만 여러 부족,
다음은 서부에 있던 서게르만 여러 부족,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북방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유틀란트반도의 북게르만 여러 부족이다.

 

동게르만에 속하는 부족으로는 동고트·서고트·반달·부르군트·랑고바르드 등이며,
서게르만에는 프랑크족·작센족·프리젠족·알라만족·바이에른족·튀링겐족 등이고
북게르만에는 데인족·스웨덴족·노르웨이족 등을 들수 있다.

 

당시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튜튼족이 로마를 침략했다가 집정관 마리우스에게 격퇴당했다.

 

얼마 후, 로마의 희대의 영웅인 카이사르는 라인 강 서쪽에 침입한
게르만족을 로마제국 문명권 안으로 흡수하여 갈리아 란 경계로

게르만족을 그들의 제국 안으로 흡수하였다.
 
1세기경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에 대한 종합보고서격인 「게르마니아」를 작성하여

이들의 특성을 꼼꼼히 서술했다.

 

이후로도 수세기 동안 게르만족과 로마 사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다.

 

게르만족은 로마 본토로 들어와 약탈하기도 했지만, 차차 이주민으로서 정착하거나 로마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타고난 무용으로 뛰어난 공적을 세웠으며,
교역을 통해 로마의 선진문명과도 계속 접촉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로마군 고위직에도 자주 올랐으며, 서기 350년경엔 게르만족이었던 플라비우스 마그누스 마그넨티우스는 로마 황제에까지 즉위하게 된다.

 

서기 375년경, 중앙아시아 훈족이 서쪽으로 진격하자
게르만족 가운데 가장 동쪽에 거주하던 고트족이 이에 압박을 받아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 영토 안으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훈족은 흑해 북쪽의 초원지대에 살던 기마민족으로 용맹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하였다.

 

이런 훈족이 아틸라 왕의 지휘하에 고트족을 침공, 약탈하자

서고트족이 먼저 이동을 시작하고, 이어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이미 무력해진 로마는 게르만족을 물리치지 못하고 동맹자로 인정하여

제국 내에 정착을 허용했다.

 

게르만족들은 정착금을 받은 대가로 로마의 용병이 되어 로마군은

차츰 게르만 군대로 대치되었다.

 

원래 게르만족들은 다신교를 믿었으며 숲을 신성시하는

자체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독교가 공인된 로마 제국 내로 이주하면서

그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었고,
나머지 게르만족 왕국들은 카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게르만족이 로마에 세운 여러 왕국 가운데 가장 크게 번영을 누린 나라는

프랑크 왕국이다.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 왕국과는 달리 일찌감치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교황권과 손을 잡았다.

 

5세기말 프랑크 왕국을 세운 클로비스는 로마 교회의 지지를 받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했으며 후계자인 아들과 3천 명에 달하는 프랑크 군인들이

그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 개종으로 인해 교회 세력과 함께 로마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

프랑크 왕국은 밖으로 주변의 게르만 왕국들을 복속시키고 안으로

법률을 정비했다.

 

한편 로마제국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 공화정에서

로마제정으로 들어선 뒤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 시대를 구가하며

세계 패권국으로 발전했다.

 

그 반면, 로마 사회는 그 전성기 이후 점차 도덕과 건실한 기풍이 무너지고
성적으로 문란해졌으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이런 면에서 국경을 넘어온 게르만족은 로마인들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게르마니아」를 통해 타키투스는, 비록 문화와 생활 수준이 낮고 원시적이지만
도덕적이고 검소하며 용맹한 게르만족들이 나약한 로마에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을 경고하고자 하였다.

 

타키투스의 우려대로 로마는 게르만족에 의해 점령되고 분열되지만,
게르만 용병들이 있었기에 로마가 수세기 동안 정치적인 혼란과
여러 사회문제를 겪으면서도 멸망이 유보되었던 면도 있었다.

 

게르만족들은 부하와 대장 사이의 신의와 충성관계가 특별하였으며,
성실하고 용맹하였으므로 로마 군에서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 서기 4∼6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

 

 

일반적으로 민족대이동이라 하면,
흑해(黑海)의 북쪽 해안에 있던 게르만계(系)의 고트족(Goths族)이

4세기 말 서진(西進)하여 온 훈족(Hun族)에게 밀려서 376년 서고트족이

다뉴브강을 건너 로마제국의 영토 안으로 이주한 것을 계기로

라인강·다뉴브강 등 로마제국 국경선의 북동쪽 일대에 있던 게르만인의

여러 부족이 잇따라 이동을 시작,


특히 동게르만에 속하는 여러 부족이 서로마 영토 안으로 깊숙이 이주·정착하여
각 지역에서 각각의 부족국가(部族國家)를 세운, 6세기 말까지 대략
210년 간의 역사적 과정에 일어난 민족이동을 말한다.

 

그러나 세계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 시대는
동·서양에 걸쳐서 거대한 세계제국의 통일이 동요(動搖)되거나 파탄되고,
변방에 있던 소박한 이민족(異民族)이 고대의 고도문명사회의 내부에 침입함으로써 그 영향을 받아 주변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등, 문화사적·정치사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주목할 만한 현상을 보여준 격변의 시대에 해당한다.

 

당시 동양에서는 진(秦)·한(漢)의 대제국 붕괴 후 삼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북방은 이민족의 침공으로 이른바 5호(胡) 16국이 난립하였고, 이어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분열을 지나(魏晉南北朝時代), 6세기 말엽에는 다시 수(隋)·당(唐)의 통일로 세계제국으로 발흥하였다.

 

그후 서양에서는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어, 동로마에서는 비잔틴제국이 간신히 구제국(舊帝國)의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발칸반도의 각 지역에서는 아바르·체코·마자르인·불가리아족(族) 등 슬라브계 및 터키계의 여러 부족이 이주하여 나라를 세웠다.

 

서로마 제국은 서기 476년에 멸망하여 그 뒤에 성립한 게르만부족국가가 분립(分立)되었으므로 북아프리카에서 잉글랜드 그리고 시리아까지 번영을 구가한 로마 제국은 두 번 다시 세계제국의 부흥을 할 수 없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원리(原理)와 기반 위에선 새로운 봉건국가(封建國家)로의 양상으로 세계사는 전개되게 되었다.

 

한편, 동·서양에 걸친 대규모의 민족이동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중앙아시아 스텝지대의 유목 기마민족(遊牧 騎馬民族)의 동향(動向)이었으며, 동양사에서 나타나는 흉노(匈奴)족이 게르만인과 접촉하여 서유럽을 침공한 훈족과 동일 민족이었는지 아닌지는 간단히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은 양쪽 모두 이동과정에서 잡다한 이민족과 합치거나 변질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북게르만 여러 부족은 동게르만·서게르만보다 약간 늦은 서기 8세기 ~ 11세기에 걸쳐 노르만인의 이름으로 잉글랜드·아일랜드·노르망디·아이슬란드 및
동쪽으로는 멀리 키예프 러시아에까지 이동하여 각 지역에 나라를 세웠고, 일반적으로 이것을 제2의 게르만 민족 이동이라 부른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민족대이동의 주인공은
동게르만·서게르만에 속하는 여러 부족이다.

그러나 이들 두 부족에는 그 이동·정착의 양상에 큰 차이가 있다.

 

즉 동게르만의 여러 부족은 모두 고향을 버리고 제국의 영토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 신속하게 먼 곳으로 이동하여 각자의 왕권을 신장한 반면, 로마 속주(屬州)의 사회와 문화의 영향력 앞에 스스로의 본성을 잃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에 반해 서게르만의 여러 부족은 라인·다뉴브의 두 강을 따라
제국의 국경선 부근이나 게르마니아의 본토에 뿌리를 내렸는데,
오랜 이동과정에서 서서히 로마의 문물을 섭취·소화하면서도 본성을 잃지 않고
게르만·로마 두 문화의 융합의 소지(素地)를 만들 수 있었다.

 

게르만족의 하나인 프랑크왕국이 마침내 중세세계를 구축하는
중심적 역할을 함에 이른 것은 이와 같은 원인(遠因)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의 통설로는 게르만인의 침입이 로마문화를 파괴한 것처럼 말하여 왔으나 각 방면에서의 실증적 연구가 진행되어 온 현재, 이 통설은 커다란 수정을 요하게 되었다.

 

즉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 부근으로 이주하여 국가를 세운 반달족의 한 시기의 만행을 제외하고는 동게르만 여러 부족의 이주·건국은 결코 문화의 파괴·약탈이 아니며 토지점유도 이전부터 있었던 로마의 군주둔제(軍駐屯制)에 따른 평화 속의 토지분할이고, 군역(軍役) 외의 분야, 즉 행정·사법·외교·징세(徵稅) 등의 직무는
대부분 종래대로 로마속주민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또한 게르만인의 침입이라 해도 그들이 정착한 지역은 특정 도시 주변에 한정되었으며 인구비율도 고작 3∼5%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민족 이동에 따른 사회경제의 변화는 로마 쪽보다도 오히려 게르만족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예로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는 토지가 남아돌고 있었으므로 종사제도(從士制度)라는 인적(人的) 결합에만 중점을 둔 사회구조였으나 로마 영토 안으로의 이주는 토지보유의 많고 적음이 권력유지의 기준이 된다는 완전히 새로운 토지관념을 심어 주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마침내는 봉토(封土)의 수수(授受)를 기능케 한 밑바탕이 되었고, 이것과 오랜 주종관념(主從觀念)이 제도적으로 결합하여 독특한 서유럽적 봉건제도를 만들어 냈다.

 

또한 반달왕국을 제외한 각지의 부족국가, 즉 프랑크왕국·서고트왕국·동고트왕국·부르군트왕국·랑고바르드왕국 등에서는 오랜 동족적(同族的)결합의 원리를 보존하면서도 더욱 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할 목적으로 그리스도교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속주민과의 융합을 도모함으로써 대체로 현저한 왕권신장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각각 특색 있는 국가의 세력균형을 초래했을 뿐, 서유럽 전지역을 또다시 로마제국과 같은 단일 세계제국하에 둘 수는 없었다.

 

동·서양을 포함한 민족대이동의 성과에 대해서 세계사적으로 고찰을 할 경우에는
이 점이야말로 서유럽의 커다란 특징이었다는 것을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보통 그 기원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전승에 근거한 이야기를 신화라 한다.


외견상으로는 어떤 관행·신앙·제도·자연현상 등을 설명하기 위해 실제적 사건들을 이야기하며, 특히 종교의식 및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신화학(mythology)이라는 말은 신화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특정의 문화적·종교적 전통을 지닌 신화들의 집대성을 의미한다.

 

신화의 전거는 확실히 진술되기보다는 함축적으로 제시된다.


신화들은 일상적인 인간생활과 거리가 멀지만 그 기반이 되는 신이나 초인들의
특정한 사건·조건·행위 들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특수한 사건들은 역사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점의 상황을 다루며,
주로 우주창조나 선사시대 초기를 그 배경으로 삼는다.


신화는 인간의 행동이나 제도, 우주적 상황에 관한 원형들을 제시해준다.

신화의 특성은 다른 종류의 문학에서도 발견된다.
원인론적인 이야기는 자연·인간·사회·삶에 관한 여러 측면의 기원과 원인들을 설명해준다.


옛날이야기는 초자연적인 존재·사건 들을 다루지만 신화에서와 같은 권위는 없다.
중세의 무용담과 서사시는 권위와 사실성을 주장하기는 하지만,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게르만 종교와 신화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발전시킨 신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설화·전승·신앙의 총체를 의미한다.

 

게르만 문화는 여러 시대에 걸쳐 흑해로부터 중부 유럽과 스칸디나비아를 거쳐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까지 전파되었다.

 

이때 게르만 전사들은 귀족으로 발전하였다.

 

초기 게르만족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료는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쟁기》에 나와 있다.

 

게르만족은 숲 속에서 살았는데 토지는 공유제였다.

경작시 공동체구성원에게 평등하게 분할되었다.

토지분할이 매해 일어나, 소유권은 영속적이지 않았다.
농업상의 필요에 의해 토지의 사유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지리적 조건 탓에 그들은 사냥과 목축업에 더 주력했던 것 같다.
공동체에서 중요한 일은 민회에서 결정하였다.
독일 역사가들 중에는 이를 귀족사회라고 주장하는 파가 있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따르면,
북동부의 게르만족은 민회 대신에 "제사장-왕"의 지위가 있었다.
민회는 서부 게르만족의 것이었다.

그들은 평시에는 공동의 행정기관이 없었으며, 전시에 지도자가 선출되기는 했으나, 제도화된 힘은 아니었다.

아무튼,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 중요한 계층은 농민 전사층이었다.

 

 

귀족 계급도 "요청에 따른 복종"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게르만족의 본격적인 귀족 계급 형성은 로마 제국 멸망 이후이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라인강을 중심으로 로마인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게르만족을 정복하려고 했으나, 토이토부르거숲의 전투에서 대패한 뒤로는 라인 강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의 라인강 진출은 게르만족에게 앞선 로마 문명을 전달해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라인 강 주변의 본, 트리에, 마인쯔, 쾰른등지에는 로마군이 주둔했으며, 군용 도로가 건설되었다.

 

게르만족은 조금씩 로마군에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면, 게르만족 전사들은 점차 대규모로 로마군에 입대하게 된다.

심지어 부족 전체가 로마군으로 입대하는 사례가 발견되기까지 한다.

로마가 이 지역에서 철수하자 그들은 로마군의 장비와 생산도구들을 불하받아,
급속히 귀족 계급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씨족적인 귀족이었다.

 

4세기 초 유럽 대륙에서는 그리스도교 개종이 철저하여 거의 모든 토착종교가 사라졌으나,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은 10세기말에야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개종 전 게르만 민족들의 종교와 신화에 대한 정보가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특히 중요한 것은 고대전통의 부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중세 아이슬란드에서 고대 노르웨이어로 쓴 문학작품들이다.

오늘날 게르만 종교에 대한 많은 지식의 상당부분은 게르만 문화권의 외떨어진
변경지대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의 문헌자료에서 얻어진 것이다.

고대 노르웨이어 시 형태인 에다와 스칼드는 시적 구조의 보수성으로 인해
게르만 신화와 전설의 예스러운 요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가치가 높다.

 

〈시 에다〉(1270경)에는 고대의 신·지혜·전승을 찬양하는 신화적인 시와
전통적인 게르만 영웅을 기리는 시가 들어 있다.

〈스칼드 시집〉은 케닝(kenning)이라고 하는 까다로운 은유의 형태로 신화를 암시하고 있으며
두운 구조가 복잡해 해독은 어려워도 매우 믿을 만한 자료이다.

스노리 스튀르드뤼손의 〈산문 에다〉(1220경)는 혼돈의 세력 및
거인족들과의 싸움 속에서 신들이 펼치는 모험과 우주의 생성에 대해 쓴 글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해석할 때는 원래의 소재를 작가가 왜곡·각색한 점과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점을 고려해야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게르만 신화의 기록은 다양하며 신화에 관한 설명도 서로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시 에다〉의 우주창조 신화는 긴눙가가프(Ginnungagap)라는 거대한 공백상태 시기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남녘의 열기와 북녘의 냉기가 합쳐져 원초(原初)의 힘센 거인 이미르가 태어나며 스노리의 작품에서는 아우둠라라는 암소가 이미르를 키운다.

아우둠라가 소금덩어리를 핥자 부리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최초의 신들인 오딘과 그 2명의 형제의 조상이 된다.

이 신들은 이미르를 죽여 그 몸으로 우주를 만들며, 나무조각으로 최초의 남자와 여자를 만든다.

 

신들은 하늘에 있는 아스가르드에 살고 인간은 미드가르드에 산다.
사악한 세계의 뱀이 살고 있는 큰 바다가 이 두 세계를 둘러싸고 이 세계의 중앙에는 세계수(世界樹) 이그드라실이 서 있다.

 

게르만족의 신들은 무사(武士) 귀족계급의 문화를 반영하는 영웅적인 신들인
에시르와 정착 농경사회와 관련된 신들인 바니르로 나누어볼 수 있다.
에시르 신들의 우두머리는 오딘으로, 그는 거인의 세계에서 시적 영감을 주는 거룩한 술을 훔쳐온 시(詩)의 신이다.

 

 

그는 또한 전투와 전사(戰士)들의 신이자 초자연적인 지혜와 신비적인 금언의 신이기도 하다.


오딘은 전투 그 자체를 좋아했으며, 자기 마음대로 영웅을 골라서 지원하다가 버리곤 했다.


전쟁에서 죽는 전사는 발할라(Valhalla)라는 오딘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 그들의 수호신인 오딘과 함께 라그나뢰크(Ragnarok:종말)의 시대가 도래하여 마침내 멸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고 죽고 다시 살아나기를 되풀이했다.

 

오딘 다음으로 중요한 게르만 신은 토르이다. 토르 숭배는 널리 퍼져 있었으며, 문헌에서 이 신은 거인의 사악한 힘과 혼돈에 맞서 신과 인간을 지켜주는 주요 보호자로 나타난다.

 

그의 망치는 북유럽 지역에서 흔히 쓰이는 부적이 되었다.


토르는 번개와 천둥, 비와 생산력에 관계가 있다.
로키는 실제로는 에시르 신이 아니면서도 늘 그들 가운데 있는 불가해한 신으로 에시르 신들을 속이기도 하지만 돕기도 한다.


그는 오딘의 착하고 잘생긴 아들 발데르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의 적은 헤임달(Heimdall)인데 이 신은 오딘의 아름답고 고상한 아들이자 신들의 파수꾼으로 나와 있을 뿐 그밖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종말론적인 라그나뢰크 신화에 따르면 로키와 그의 괴물 자식들은 신과 인간들의 세계를 파괴하는 세력 편에 서 있다.

 

에시르 신들의 지배를 받는 바니르 신들은 다산과 번영의 신들이다.
그 중 니외르드는 번영·부·바다의 신인데 여러 학자들은
이 신을 종래의 풍요의 여신 네르투스가 남성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아들 프레이르도 풍요의 신이며 몇몇 기록에 스웨덴 왕족의 조상으로 나와 있다.
프레이르의 누이인 프레이야는 사랑과 풍요의 여신일 뿐만 아니라 또한 원시적 주술인 세이이르의 여신으로서 오딘을 비롯한 에시르 신들에게 그 주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중세의 문헌자료에는 여러 신화 이야기가 나오지만
실제적인 종교의식과 신앙에 대해 알 수 있는 믿을 만한 정보는 드물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빈약한 자료에서 볼 때
게르만 종교는 후기단계에서 2가지 성격을 보여주는데 대개 씨족중심적이고 번영을 기원했으며 또한 한 인간과 그 개인의 신 또는 수호령(守護靈)이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게르만 종교에서 수호령은 종종 신 못지않게 중요했다.

 

예를 들어 디시르는 씨족 중 모계의 조상령으로, 그를 섬기는 이들에게 번영을  가져다 준다고 해서 사람들은 정성스러운 사적인 제물을 올려 그를 달래는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  고대 게르만족의 역사
http://www.nobelmann.com/about/race/race.htm

 

. 독일 연구 사이트

http://www.nobelman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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