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3일 화요일

[경향]- 광화문 복원 총지휘한 대목장 신응수씨

 

“경복궁 20년간 출.퇴근 … 근정전 복원때 조선건축 정수 배워”

▶ 우리 시대 마지막 궁궐 도편수로 불리는 대목장 신응수씨. 올해 광화문 복원을 끝으로 20년에 걸친 경복궁 복원 대역사를 마무리하고 또 하나의 국가적 대사인 숭례문 복원을 시작한다.

 

■ 대목장 신응수 씨는 누구??


궁궐 대목장의 맥 이은 ‘우리 시대 마지막 도편수’

 

신응수씨의 고향은 충남·북의 경계인 충북 청원군 오창면이다. 충남 병천중학교에 입학해 20리길을 걸어다녔다. 9남매 중 여덟째.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17살 때 상경했다. 목수였던 사촌형을 따라 공사판을 떠돌았다.

 

서울 신촌의 봉암사 절 복원공사장에서 대목장인 이광규씨를 만났다. 목수들의 잔심부름과 함께 물을 데우고 연장을 갈았다. 망치질부터 끌질, 대패질을 배우며 이씨의 칭찬을 들었다. 1962년 이씨는 그를 숭례문 중수 공사장에 데려갔다. 거기서 스승의 스승인 조원재씨를 만났다. 조씨는 1906년 덕수궁 중건과 창덕궁 내전 복원에 참여했던 ‘궁궐 목수의 전설’인 최원식의 제자였다.

 

숭례문 공사에서 조씨는 도편수, 이씨는 부편수였다. 워낙 무서워서 모두들 옆에 가기를 꺼렸다. 힘들어서 대패질을 대충대충 하면 멀리서도 금방 알아채고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막내인 신씨는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도편수 조씨가 잔꾀를 부리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그를 눈여겨봤다.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하면서 한옥 도면을 가르쳐줬다. 본격적인 대목의 길로 이끈 것이다. 군 제대 후 스승들과 함께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진주성 촉성문, 서울 숭인동 청룡사 대웅전, 용인 호암장 신축 공사 등에 참여했다.

 

70년 불국사 복원공사 때 이광규 도편수가 그를 불러 먹칼을 줬다. “먹을 그어라.” 먹칼은 먹줄과 함께 대패질을 끝낸 나무에 자르고, 파고, 조각하는 자리를 표시하는 도구다. 목수가 먹칼을 준다는 것은 그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부편수를 맡긴다는 뜻이다. 5년 뒤 수원성 복원공사에선 도편수를 맡겼다. 불과 서른다섯 살의 젊은 목수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신씨는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이어지는 궁궐 대목장의 맥을 계승했다.

 

그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서울 필동 한국의 집, 경주 안압지 건물, 단양 구인사, 부여 삼충사, 울산 동축사, 유성 현충원 현충문, 부여 무량사 극락전 보수 공사 등을 지휘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의 승지원, 청와대 상춘재와 대통령 관저, 경주 안압지 임해전, 유관순 추모각 등 수많은 한옥도 그의 솜씨로 세워졌다. 창경궁과 창덕궁의 주요 전각을 보수하는 등 대부분의 고건축 문화재들도 그의 손을 거쳤다.

 

91년엔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인 ‘대목장’이 됐다. 같은 해 경복궁 복원정비 사업의 도편수를 맡아 20년 동안 90여동의 궁궐 전각을 복원했다. 숭례문 복원 공사를 총지휘하는 도편수로 뽑히는 등 ‘우리 시대 최고의 목수’로 인정받고 있다. 대통령 표창, 만해예술상, 옥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천년 궁궐을 짓는다> <목수> <경복궁 근정전> 등 세 권의 책을 냈다


 

마침내 광화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3년 동안 답답하게 둘러쳐져 있던 가림막을 벗었다. 지나는 길에 얼핏 보아도 광화문은 조선왕조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정문으로서 늠름한 위용을 갖춘 듯했다. 금강송으로 뼈대를 갈아입은 목조 광화문은 오는 광복절에 맞춰 일반에게 공개된다고 한다.


우리 시대 마지막 궁궐 도편수로 불리는 대목장 신응수씨. 올해 광화문 복원을 끝으로 20년에 걸친 경복궁 복원 대역사를 마무리하고 또 하나의 국가적 대사인 숭례문 복원을 시작한다

 

신응수씨는 광화문 복원 작업을 총지휘한 우리시대 최고의 대목장(大木匠)이자 궁궐 도편수(목조 건축의 총감독)다. 때마침 지난달 26일 칠순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고희연을 열었다. 1941년 음력 6월15일생.

 

그의 칠순이 더욱 뜻깊은 것은 올해 광화문 복원을 마지막으로 20년에 걸친 경복궁 복원의 대역사를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하나의 국가적 대사인 숭례문(남대문) 복원을 그의 손으로 시작하는 해이기도 하다.

 

지난달 29일 경복궁 근처 서울 종로구 통의동 사무실에서 신씨를 만났다. 투박한 손으로 그가 내민 명함은 특이했다. 2001년 복원한 경복궁 흥화문 사진 위에 은박 돋을새김 글씨로 ‘申鷹秀’라고 이름만 새겨져 있다. “이름에 매응(鷹)자가 특이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게, 어머니가 향나무 숲에서 매가 날아가는 태몽을 꾸고 나를 낳았대요. 그런데 획수가 많아서 이름 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어.”

 

그는 인터뷰 내내 “그쎄(글쎄)~ 인제(이제)~ 아무래도 그 뭐~” 하는 식으로 애매하게 늘어지는 ‘원단’ 충청도 말투를 그대로 썼다. 그는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이름과 사주가 좋다고 하더니, 그 복으로 좋은 스승과 시절 인연을 만나는 행운이 많았던 것 같다”고 했다.

 

“목수 최고의 꿈이 궁궐 도편수인데 시대를 잘 만나 이런 큰일을 하게 됐어요. 궁궐을 뜯었다가 다시 짓는 경험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기회가 아니지요. 조선 정궁인 경복궁과 불에 탄 숭례문을 모두 내 손으로 복원하게 된 것은 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내가 이만큼 인정받는 것도 모두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하지요.”

 

이쯤에서 경복궁 복원을 마무리한 도편수의 감회를 듣는 것이 순서겠지만, “이런 국가적 대사에도 ‘정치’가 끼어드니 뒷말이 많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당초 12월로 예정됐던 광화문 공개는 G20 서울 정상회의(11월)에 맞춰 9월로 바뀌었고,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광복절 행사에 보여주기 위해 또다시 공기(工期)를 앞당겼다.

 

- 특정 행사 시점에 맞추기 위해 날짜를 앞당기면서 부실 공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공사기간을 줄이는 것은 내가 제일 싫어해요. 이미 공사가 다 끝나 있어요. 광화문은 2009년 말에 마무리하기로 돼 있었다고요. 광화문광장 공사와 맞물리는 바람에 오히려 늦어졌지요. 처음부터 주말에 쉬고 하루에 8시간씩 일하는 스케줄을 바꾼 적이 없어요. 야간작업, 우중작업을 한 번도 안 했어요.”

 

- 기와 작업에서 서두른 흔적이 있다고 하는데요.

 

“기와 공사를 하면서 강회다짐이 마르기 전에 기와를 덮었다고? 이것은 작업 자체가 불가능해요. ‘산자(대나무나 싸리나무로 발을 만들어 까는 공법)’를 개판(나무판) 공법으로 바꿨다고 하는 것도 작업시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개판이 더 튼튼하고 공사 기간도 더 길단 말입니다. 그런 헐뜯는 이야기 때문에 좀 서운하고 속이 상해요.”

 

그는 이 대목에서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이미 여러차례 설명했는데 똑같은 걸 자꾸 묻는다며 불편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경복궁 흥례문을 복원할 때도 나무가 터졌다느니, 추녀가 너무 높다느니 하는 말들이 있었어요. 감사원 감사까지 받았지요. 소나무는 원래 마르면 몇몇 군데 균열이 생기는 겁니다. 하지만 송진이 있기 때문에 직결로 터지지 않고 강도에도 전혀 문제가 없어요. 추녀는 세월이 지나 처지는 것까지 감안해서 높인 것이고요.”

 

- 세종대왕 동상 뒤에 한자 현판을 거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데요.

 

“그것은 내 소관은 아니지만 이번 작업의 원칙이 옛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겁니다. 고종 때 중건 뒤 걸렸던 임태영의 글씨를 디지털 복원해 사용하기로 한 거지요.”

 

- 새롭게 복원된 광화문은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한국전쟁 때 불탄 뒤 1968년 중건 때 콘크리트로 지었던 문루를 금강송 목재로 되살렸어요. 일제 조선총독부 청사에 맞춰 비뚤어졌던 위치도 바로잡았어요. 목조 건물의 웅장함과 힘차게 뻗어올라간 처마 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궁궐 복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고증과 실측, 그리고 경험이지요. 한 번 고치려면 자재와 인력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완벽하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 이제 경복궁 복원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건가요.


옛날 모습 그대로 재현하는 전통의식

 

“그렇지는 않아요. 중요한 건물만 복원했어요.

 

1차로 궁궐 전체의 30~40%만 복원된 겁니다.

 

문화재청에서 나머지는 어떻게 할지 모르지요. 꼬박 20년을 경복궁에서 출퇴근하면서 93동의 건물을 보수하고, 복원했어요. 중년에 시작했는데 지금은 주름살이 늘고 머리가 하얗게 셌어요.”

 

- 숭례문 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나요.

 

“목재를 이미 다 확보해 경복궁에서 건조 중입니다. 가을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면 굉장히 바빠지겠죠. 숭례문 화재가 국민들 가슴을 아프게 한 불행한 사건인데 숭례문을 태워먹은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서라도 국보 1호라는 위상에 걸맞은 복원을 해야지요.”

 

숭례문은 그에게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신씨는 62년 숭례문 복원공사 때 부편수인 이광규 선생을 따라 목수의 길에 들어섰다.

 

- 20대에 숭례문 복원 작업에 참여했는데, 50년 만에 최고 목수가 되어 숭례문을 복원하게 됐군요.

 

“숭례문 작업을 준비하면서 스승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나이로도 경험으로도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해요. 스승들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참입니다.”

 

- 작업 방법은 60년대와 많이 다르겠지요.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 전통 목조 건축은 ‘정성’ 그 자체예요. 대들보에서부터 지붕, 추녀 등을 잇는 모든 부속물들이 못 하나 없이 일일이 깎고 끼워 맞춰나가는 겁니다. 숭례문은 옛날 연장을 가지고 옛날 방식대로 작업할 겁니다.

 

재목을 다듬고 손질할 때도 도끼나 대자귀, 내림톱 같은 전통 도구를 사용하고, 목재를 끌어올릴 때도 전통 운반도구인 거중기를 쓰는 식이죠. 그 과정을 공개해서 학자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좋은 고건축 공부가 되게 하려고 합니다.”

 

- 궁궐 복원에는 왜 우리 소나무만 고집합니까.

 

“상징적으로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잖아요. 옛날부터 궁궐에는 소나무만 썼어요. 고건축물을 복원해보면 소나무가 목재로 얼마나 좋은지 나타나요. 특히 적송은 단단한 데다 송진이 들어 있어 잘 썩지 않아요. 천 년을 버티는 목재는 소나무밖에 없어요.”

 

- 조선시대 건물 복원 말고 또 다른 작업을 하고 있나요.

 

“경기 성남시 분당의 대광사 미륵보전을 짓고 있고, 국회의사당 내 의원동산에 한옥을 세우고 있어요. 미륵보전은 높이가 33m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목조건축물이 될 겁니다. 국회의사당은 석조건물만 있었는데 이제 이곳에 천 년이 지나도 인정받는 한옥을 남기고 싶어요.”

 

- 궁궐 건축 가운데 최고로 꼽는 건물이 무엇인가요.

 

“어느 나라든 궁궐은 그 나라의 최고 건물이잖아요. 조선 궁궐 전각 중에서는 궁궐의 중심이면서 규모 면에서도 국내 최대인 경복궁 근정전이 가장 훌륭합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근정전을 140년 만에 뜯고 보니까 속속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지어졌는지 정말로 대단했어요. 근정전 공사를 통해 조선 건축술의 정수를 배웠어요.”

 

- 대목장으로서 제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좋은 스승을 만나 이만큼 이루었으니 좋은 제자를 키워야지요. 한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배우겠다는 사람이 많아요. 죽도록 열심히 일하겠다는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신응수에게 배웠다는 사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혼을 담아 일하라고 잔소리하지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까다롭고 고집스럽다는 말을 들어요.”

 

- 정식 제자는 몇 명이나 있습니까.

 

“무형문화재 조교인 문기현이라는 수제자가 있고, 부편수가 5명 있어요. 또 공사가 결정되면 경력 10~20년의 제자 10여명이 팀을 이뤄 작업합니다.”

 

- 노송을 벨 때 치르는 의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고사를 지낸 뒤 도끼를 들고 “어명이요!” 하고 세 번 외친 다음 나무를 벱니다. 수백년된 나무를 자를 때마다 마음이 편치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사찰에서 절을 증축할 때 큰스님이 가르쳐주더라구요. 나무도 생명인데 벨 때 그냥 베지 말고 예를 올리는 것이 좋다고. ‘어명’이라고 하는 것은 궁궐을 짓기 위해 쓰인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말하자면 천 년을 갈 건축으로 새로 태어나게 해주겠다고 나무를 위로하는 거지요.”

 

그는 28살에 결혼해 2남3녀를 뒀다. 큰아들이 강릉에서 목재소를 운영한다. 한옥 건설에 필요한 나무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둘째아들은 국회의사당 한옥 공사 현장에서 목수일을 배우고 있다. 그는 소나무를 국목으로 정하자는 운동을 벌이는 ‘솔바람모임’에도 참여하고 있다. 강원도에 165만여㎡(50만평)에 이르는 임야를 사들여 소나무를 키우고 있다.

 

“주로 석탄공사에서 불하하는 땅을 샀어요. 마을 옆의 산이면 돈이 되지만 개발 가능성이 없는 깊은 산만 골랐어요. 그곳에 목재로 쓸 수 있는 소나무가 많거든요. 아들에게도 그 나무들은 베지 말고 대를 이어 키워야 한다고 했어요. 몇 대가 지나면 또 궁궐 공사를 할 테고 제대로 키운 적송이 필요할 겁니다. 그때 쓸 수 있게 해야지요.”

 

- 돈은 많이 벌었나요??

 

“평생 한길을 걸으면서 ‘궁궐 도편수’라는 명예까지 얻었어요. 국민 세금에서 보수를 받았으니 국록을 받은 셈이지요. 그래서 한옥 건축의 전통을 이어갈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큰돈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모든 재산을 ‘한국전통건축박물관’ 건립에 쓰려고 해요. 전시관과 한옥 체험관, 목수학교를 만들 계획이죠.”

 

- 언제 지어집니까.

 

“계획대로 하면 1만여평이 필요한데 터가 아직 마련이 되지 않았어요. 처음엔 강릉과 청주에서 추진하다가 어그러졌고, 최근 부천에서도 거의 성사되는 듯하다가 부지 매입이 무산됐어요. 그 바람에 10년 넘게 지연되고 있어요. 요즘은 할 수 없이 서울 북촌에 작은 전시관부터 마련하고 그 다음에 땅을 찾으려고 합니다.”

- 사는 집은 한옥인가요.

 

“아니요. 개포동 아파트에 삽니다. 하하.”

 

- 한국 최고의 목수가 아파트에 삽니까.

 

“전통건축박물관과 함께 내가 살 한옥을 제대로 지으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

 

“좋은 나무를 만나야 좋은 목수가 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우리 시대 마지막 궁궐 도편수 신응수씨. 그는 몇 년 전부터 술을 확 줄이고 열심히 운동을 한다. 더 오래 나무를 찾아다니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강원도 깊은 산으로 기둥재목을 보러 다닌다.

 

“나무 다루는 일이나 사람 다루는 일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요. 맘에 드는 나무를 만나는 것은 사람 인연 맺기만큼이나 어렵지요. 우여곡절을 겪은 나무는 나이테가 촘촘하고 결이 아름다워요. 그런 나무가 목재로도 튼실하고요. 험한 환경을 이겨내야 강도가 단단해지는 법이거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그게 인생이여….”

 


세종문화회관이 보이는 광화문 광장 야경


인터뷰 한 사람 :
대한민국 문화 에디터 김석종 씨

글쓴이 경향일보 김세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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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문화지도 - 소구리 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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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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