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5일 금요일

오두방정 님의 '신라와 로마제국 시대의 포장도로 비교' 분석

   

   신라시대와 로마제국의 포장도로 비교 분석

 

                          - 대구 봉무동 신라시대 포장도로는 왕릉 참배도로일 가능성 -

 

고대 역사시대의 유적이라고 하면 흔히 특정 건축물이나 사용되었던 물품 유물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지하에 묻혀 있는 도로를 발굴한다는 것은 좀더 역사적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걸어가보는듯한 기분이 들어서 또 다른 상상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강한 느낌을 준다.

 

역사적으로 문화의 틀이 큰 나라들은 대체적으로 포장도로를 맹렬하게 건설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얼마전 대구에서 발굴된 신라시대 포장도로가 눈에 띈다.

 

고대 국가들의 포장도로란 돌과 자갈을 깔아 수레가 진창에 빠지지 않게 하는 효과를 내도록 만든 도로로 만든 그 당시에는 특별한 심혈을 기우려 공사한 도로다.

 

고대 국가들의 돌 포장도로는 일종의 왕의 수레가 가는 길이거나 군사도로의 역할을 했다. 특히 왕이 행차를 할 경우는 선왕의 능을 참배하는 도로이거나 제의적인 행사용 도로일 경우가 많았다.

 

대구는 달구벌 이란 이름답게 경주의 서라벌과 더불어, 신라의 주요 지역으로서 달구벌의 용도에 따라 간선도로를 만들었을 것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번에 발굴된 신라 포장도로는 총길이 143m로 상당히 긴 유적이다.

 

특히 수레가 다닌 흔적으로 도로상에 홈이 파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고 그것을 고쳐 쓴 흔적까지 있다. 도로의 폭은 너비 3미터에서 5미터 20센티 정도로 황갈색 사질 점토층에 15센티 내지 40센티 정도의 강돌과 깬돌을 사용하여 1-2단을 깔아놓은 그야말로 포장도로라는데서 흥미를 돋군다.

 

돌 포장 뒤에 황갈색 사질토로 보강한 것은 고려시대 이후까지도 사용된 흔적으로 발굴단은 파악하고 있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레 흔적으로 두 줄의 홈이 폭 2미터 간격으로 확인된 것은 로마시대의 포장도로의 수레자국을 연상하게 하는 아주 상당히 고급 도로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남서-북동향으로 뻗어 있는 이 도로는 남서쪽으로 금호강을 향하고 북동쪽으로는 인근 봉무동 고분군과 단산 고분군 사이의 계곡부를 향하고 있다. 이것은 적어도 왕이나 토호급 지위를 가진 인물이 고분을 왕래하던 길로 파악한다.

 

로마시대 도로들 가운데도 무덤을 향하여 놓여진 포장도로가 흔히 발견되는데, 이번에 대구에서 발굴된 신라 포장도로와 이와 같은 경우라 볼 수 있겠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앞에 화려한 포장도로를 존재하고 있듯이 고대 국가들의 일반적인 왕릉으로 가는 도로들은 현 세상의 왕궁과 직접 연결되는 이승의 선왕적인 권위와 전제 군주로써의 파워를 상징하는 표상의 도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고대 미주 인디언들은 지배자의 중심 궁에 바로 연결된 앞선 지배자의 고분들이 이어진 형태의 왕궁-고분 형태가 발견되는 것이라든지, 티벳의 포탈라궁에는 앞선 달라이라마 시신들이 궁 내부에 따로 안치된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은 ' 왕도 '를 약간 단축시킨 형태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선왕조에서도 왕들은 왕세자 때부터 부왕에게 매일 조례를 배알했듯이 선왕릉에 참배를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왕권의 주요 행사였었고, 왕릉으로 가는 도로는 특별히 현재의 왕과 선왕의 연결되는 길이란 측면에서 이주 특별한 포장도로 라고 보면 되겠다.

 

조선왕조 22대 정조대왕이 수원행차는 김홍도의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班次圖)’ 에서 보듯이 수원에 있는 선왕격인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무덤인 현륭원을 8일 동안 행차한 것을 말하는데,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다녀온 것도 '선왕'에 대한 예우를 행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을 알 수 있다.

 

한양와 수원 사이는 그래서 능행 행차도로로 이해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한강을 건너는 부교 건설도 그 일부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대구의 신라시대 포장도로에 대한 발굴단의 해석은 " 수레의 이용은 당시로서는 대규모의 물적 교류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 이라고 풀이했는데 아마도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추측된다.

 

물론 왕래 교역도로였을 수도 있으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번 대구 봉무동 신라시대 포장도로는 봉무동 고분군과 단산 고분군 사이에 놓여진 것으로 볼 때 왕의 참배 도로의 의미가 강하게 보인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포장도로들은 일반적으로 묘지와 연결되어 있어서, 고대 로마 문화에서도 묘지 방문 도로의 의미가 컸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래에 보이는 사진은 1960년에 발굴된 로마시대의 포장도로이다.

 

이 도로는 왼편에 유대교 사원이 발굴되어 종교적인 행차의 도로의 의미를 가진다.

        

 

              

   *Roman road Ambrussrum:

신라의 포장도로처럼 이곳 로마시대 포장도로도 마차 자국이 나있다.

 

                     

                             * The roman road Via Domitia in France

 

 

인디아나 존스 영화에도 나왔던 요르단의 피트라(Petra)에 있는 암벽 사원은 2천 5백여년 전에 암벽을 깎아 만든 피난처와 같은 숨은 사원이다.

 

이 사원으로 가는 길은 포장도로로 만들었다. 피트라 포장도로는 3미터에서 10미터 폭의 너비를 가진 돌을 납작하게 블록처럼 깐 도로였다.  

 

일반적으로 로마를 동양역사 사료에서 한자어 표기로 라마(羅馬)라고 한다.

 

신라는 이러한 측면에서 뉴-로마(新羅) 이미지 라는 이미지가 존재한다.

 

신라인들도 로마인들만큼 말을 많이 사용하여 일본의 기마민족설의 기반이 되는 말(horse)의 나라이기도 했다.

 

로마제국의 유리 제조가 신라에서도 존재하는 것처럼 신라시대 달구벌에서 사용되었던 포장도로는 로마제국의 포장도로를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만든다.

 

돌로 된 포장도로에 수레바퀴 자국이 선명한 것은 수레의 바퀴가 같은 궤적으로 몰고가는 반복에 의한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 왕국에서 통일신라는 문화적인 면에서 로마 문화와도 역사적인 연결이 있다는 학설들이 상당히 나와 있다.

 

대구에서 발굴된 신라시대 포장도로는 로마시대의 도로만큼 수레바퀴 자국이 선명한 강돌과 깬돌을 사용하여 포장을 만들었다든지 고분 능 사이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신라시대 또는 그 이전의 왕의 행차도로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12/28/2005 오두방정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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