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Lee sang) 시인 탄생 100돌, 생애 마지막 흔적 일본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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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분쿄구의 도쿄대학 부속병원 관리·연구동 건물. 문학평론가 서영인씨는 “이상은 1937년 당시 중앙진료동이었던 이 건물에서 진료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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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질 수 없는 영구한 공석을 하나 만들어놓고 상은 사라졌다. (…)
시단(詩壇)이 갑자기 반세기 뒤로 물러선 것을 느낀다.
내 공허를 표현하기에는 슬픔을 그린 자전(字典)속의 모-든 형용사가
모두 다 오히려 사치하다.
‘고(故) 이상(李箱)’-내 희망과 기대 위에 부정의 낙인을 사정없이
찍어놓은 세 억울한 상형문자야.’
박제가 돼버린 천재. 극도의 육체적 피로 속에서만 은화(銀貨)처럼
맑아지는 정신으로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부리며
시대와 문학을 조롱했던 전무후무한 실험주의자.
그 자신 빼어난 시인이었던 김기림(1908∼?)조차 이상의 사망 두 달 뒤
월간지 ‘조광’에 실은 추모글에서 한국 현대시가 50년 후퇴했다며
아쉬워했던 이. 시인이자 소설가, 건축가였던 이상(1910∼1937)이 태어난 지
올해로 100주년, 사망한지 73주년이다. 하지만 그의 문학과 생애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서울대 국문과 권영민 교수는 “이상이 남긴 텍스트 전체보다
그에 대한 해설의 분량이 훨씬 많다”고 말한다. 해석의 어려움 때문이다.
시인 장석주씨에 따르면 대표작인 연작시 ‘오감도’ 제1호에 나오는
‘13인의 아해’를 놓고도 해석이 분분하다.
‘예수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13인’‘일제하의 13도’ 등 사람마다 다르게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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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죽기 전 지인들에게 센비키야의 멜론이 먹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센비키야는 19세기에 문을 연 도쿄 긴자의 고급 과일가게다. 사진은 센비키야의 옛 모습. |
이상의 생애, 특히 일본에서의 최후는 일화(逸話)를 넘어 거의 전설 수준이다.
우선 그의 일본 행부터 석연치 않다.
이상은 기생 출신 동거녀 금홍이 사납게 굴면 몸을 피해 찾았던 절친한 소설가 박태원 등 친구들의 만류를 극구 뿌리쳤다.
일본 가서는 ‘날개’ ‘오감도’ 같은 실험적 작품 말고 정통적인 시·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훗날 화가 김환기와 결혼해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꾼, 이화여전 출신의 자유연애주의자 변동림과 결혼한 지 불과 넉 달만인 1936년 10월의 일이다.
하지만 알려진 대로, 이상은 기대를 품었던 도쿄에서 서양을 베낀
껍데기일 뿐인 이른바 ‘모조(模造)된 현대’를 읽는다.
도쿄역 앞 고층빌딩 ‘마루노우치’에서 환멸을 읽고, 거리에서 몹시
가솔린 냄새가 난다고 투덜댄다. (산문 ‘동경’) 급기야 일본 경찰에 체포돼
한 달간 구금된 후 지병인 폐병이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다.
17일은 이상의 기일이다. 와세다 대학 교환연구원으로 있는
문학평론가 서영인(39)씨의 도움을 받아 13일 이상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 나섰다.
이상이 입원해 최후를 맞은 분쿄(文京)구의 도쿄대 의학부 부속병원부터
방문했다.
소설가 김연수의 장편 『꾿빠이, 이상』은 이상 매니어인 서혁민의 상상을
통해 이상의 최후를 실감나게 전한다.
환자를 접한 일본인 레지던트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방치했냐’고 나무라자,
한인 학생들이 ‘괜히 왜놈 병원에 왔다’며 흥분하는 대목이다.
당시 병원 건물은 현재 원장실이 있는 관리·연구동으로 쓰이고 있다.
김연수는 이상이 숨진 곳은 병원건물 북쪽 격리병동이었다고 소설에 썼다.
다다미방 물료(물리치료)과 병실도 언급한다. 격리병동이 물료과 병실인지는
분명치 않다. 의대도서관을 찾았다.
옛 사진이 나온 책자 『의학생과 그의 시대』에서 1918∼45년 지금의
도쿄대 남문 왼쪽에 ‘물료내과병실’이라는 건물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연수가 언급한 격리병동과는 반대 방향이다.
이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발길을 서쪽으로 돌려 지금은 치요다(千代田)구로 바뀐 간다(神田)구
이상의 하숙집 자리를 찾았다. 의대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다.
권영민 교수가 임종국 편 『이상전집』에 나온 하숙집 주소 ‘101-4번지’가
잘못됐다며 ‘10-1번지 4호’로 바로잡은 곳이다. 역시 흔적도 없다.
센슈대학 7호관 고층 건물이 서 있다.
서영인씨는 “이상은 도쿄에서 급조된 근대에 대한 환멸은 물론
도쿄의 흉내에 불과한 경성의 근대성에 대해서도 반성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병사했다”고 말했다.
여전히 작품 해석과 창작에 있어서 넘어야 할 장벽인 이상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김연수씨의 접근 방식이 시사적이다.
김씨는 “이상은 예술은 물론 삶과 죽음까지도 철저히 모더니스트였다”라고
말했다.
또 “한국문학의 큰 두 조류 중 하나인 모더니즘 계열 작가들은 여전히
이상의 영향 안에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런데도 기인(奇人)적인 측면만 주목해 그의 삶과 문학을 스캔들로
대하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그러면서 이상의 산문 ‘권태’‘산촌여정’ 등을 추천했다.
“소설이나 시보다 빼어나다”는 것이다.
읽어보니 빼어난 문장가, 이상이 보인다.
이상 시인은 역시 열린 텍스트다.
도쿄=글·사진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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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문]-정몽헌과 이상의 자의식에 관한 고찰 / 실포 |
'자의식의 과잉'이라는 주제로 심리주의적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한 이상이라는 작가와 그 작품에 관한 분석적 측면에서 그리고 '금강산 투자의 과잉'으로 고 정몽헌 현대건설 사장의 투신 자살사건을 접하면서 사회 병리학적 기준 하에서 정신 분석학적 방법을 통해 그 '자의식의 과잉'에 대한 조명을 한 번 고찰해 보자. ,,,,,,,,,,,,,,,,,,,,,,,,,,
"날자 날자 날아 보자꾸나"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도하고 오헤려 그 아내로부터 왜 눈치없이 그걸 보았느냐 다그침을 당하고 참으로 딱하고 억울한 폭행(?)을 당한 뒤 숨가쁘게 달려 올라간 미쓰꼬시 백화점 빌딩 옥상 꼭대기 그 한 모서리 위에서 <<날개>>의 주인공인 <나>가 뇌아리는 독백.
현대본사 빌딩 12층 회장 집무실 작은 쪽창을 통해 대북 사업과 각종 현대 비자금 조사를 받아오던 정몽헌 현대 회장이 투신 자살을 하였다 한다.
인생사 세옹지마 호사다마 라고 세상사가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왜 눈치도 없이 지금 우리들 보고 도와달라는거야 앙? 앙?
어제의 권력이 어느덧 스르르르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오늘의 권력은 팔짱만 끼고 자신의 목덜미를 팍팍 짓누르고 있는 특검에 목덜미를 잡힌 위기상황에서 헛냥 목도만 하고 앉았는데 왜 눈치코치도 없이 거금을 주었느냐? 다그침을 당하고 있었는 바 ...
한 옛날 미쓰꼬시 빌딩으로 올라가 독백하는 <날개>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빌딩 집무실에 올라가 고 정몽헌 현대 회장은 가족들에게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날자 날자 그래 날아 보자꾸나" 류의 유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두 나래를 펴 그 차거운 공지바닥 아래로 처참히 몸을 내던져 버린다.
큰 대자로 드러누운 그의 두 눈망울에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한맺힌 이슬 방울들이 찬 서리처럼 새벽 하늘 위로 맺혀 볼 위로 구르고 있다.
현대가문에서 부친의 인정을 받아 온갖 영욕을 다 누려온, 그리고 현대그룹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는 그 정몽헌씨가 잠시나마 뇌아렸을 법도 한 상기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문귀와 맥락을 같이 할 그 고뇌에 찬 독백을 생각하자니 각박한 식민지 하에서 수많은 사업의 연속적 실패와 더불어 페결핵이란 당시의 천형인 불치병을 앓으면서도 <<날개>> 라는 소설을 창작한 이상이란 작가가 부시시 고개를 쳐드는 건 또 왜 그럴까?
그러고 보니 이상의 문학적 가치성은 바로 근대 문학을 현대 문학으로 태동시킨 사람으로, 한편으론 정몽헌씨는 근대 산업을 현대 산업으로 전환시키는데 크나 큰 일조를 가하였던 고 정주영 현대 왕 회장의 법통을 이어받은 장본인으로 두 양반 다 공히 "현대"를 부르짖다 안타까운 인공의 날개를 펴며 그 공지 바닥아래로 처참히 곤두박질쳐버린 비극적 생애의 종말 측면에서도 그 물질적 재복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히 자의식의 과잉이라는 자기 분열적 증후군이라는 공통분모를 도출해 낼 수 도 있을 법한 여지가 있지 아니한가란 잡상을 뇌까려 보게 한다.
불세출의 요절작자,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인 작가 이상 !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문재라는 그 이상이란 필명으로 수많은 에세이와 소설 그리고 수십편의 난해한 시를 문단에 남겨두고, 이름 없는 동경 어느 거리에 쓰려져 결국 제국대학병원 침상에서 행려병자로 싸늘히 식어져 간 이상이란 작가를 생각해 본다.
본명은 김해경, 191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37년 27세에 일본 동경에서 요절한 작가. 그는 시와 수필에도 능했고, 소설도 많이 발표했었다 한다.
그리고 각종 잡지에 수많은 삽화를 그려 기고도 했었던 어린 한때 화가 지망생이기도 한 전도유망한 건축학도이자 총독부 건축기사였다 전한다.
당시 그는 가장 난해한 시를 문단에 발표하여 가장 특이한 존재가 되었다지만, 그의 시에 대한 난해성 여부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의 존재는 우리 문학사 상에 있어서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에서나 가장 특이한 존재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작품은 30여편의 수필과 시 <<오감도>> 로 대표되는 수십편의 시가 있으며, <<단발>>, <<실화>>, <<날개>> 등으로 소설도 십여편 정도 남겼다. 그 중 <<날개>>는 그의 대표적 작품에 속하는 작품이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은 은화같이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않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리 속에 의례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가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처럼 늘어 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낏 좀 들여다 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배회자 말이요 이런 여인의 반- 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요 - 만을 수령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요 그런 생활 속에 한발만 들여 놓고, 합이 두개의 태양처럼 마주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요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 둔 모양이오 긋바이-"]
이것은 "날개"의 허두 몇 귀절이다. 독자들은 우선 이 귀절을 읽으면서 과연 무엇을 느끼셨을까?
그것은 그의 글이 주정적 것에서 벗어나 아마 지성적이며 보다 주지적인 것을 아마 느꼈을 것이다.
이 짧은 한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상의 특성은 먼저 그 주지적 성격에 있다.
우리나라의 신문학은 어느 편이냐 하면 1900년부터 발족되기는 하였으나, 1930년대 초기에까지도 아직 주정적인 방향에서 탈피되어져 있지 않았다.
1935년을 전후해서부터 종전의 주정적인 정신에 대체해서 주지적인 정신이 나타났으니, 그 한 사람이 바로 이상이었던 것이다.
주지적인 것은 대개의 경우 자각적, 비판적 성격을 띄게 되는데, 이 소설은 그와 같은 자각적, 비판적 성격이 아주 강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나>라는 주인공과 그의 아내와의 관계를 제재로 한 작품이다.
<나>는 그의 아내의 부정을 다 알고 있다. <나>의 그 아내에 대한 비판은 아주 예리하다. <나>는 그 아내의 뱃속 창자까지 다 들여다 보고 있다. 이와 함께 그러한 그의 아내를 버리지도 또는 사랑하지도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비판도 역시 예리하게 해부되어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비판력은 예리하게 발동되고 있지만 주인공인 <나>의 의지력이나 행동력은 거의 거세되어져 있다란 점이다.
여기에 이 작품의 특수한 특성이 숨어있다. 이 작품은 이를테면 자의식의 과잉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인물의 권태의 심리를 그린 것이다.
주인공인 <나>의 자의식의 원인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지성에서 온 것이다. 그는 모든 사물을 맹목적으로 받아 들일수 있거나, 무조건적으로 어떤 대상 속으로 몰입되거나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기에는 그는 너무나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동하지 못한다.
자신의 하나하나의 행동까지도 스스로 감시하고 비판해 가는 사람에게 행동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자의식의 과잉이 나타난다. 즉, 의식 세계는 복잡해지고 확대되는 데에 반비례하여, 행동 세계는 단일화되고 축소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가 이 세상이 싱거워서 못 살겠다는 라는 권태의 심리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 것이다.
독자들은 자의식의 과잉을 일찌기 세익스피어의 <햄릿>에서도 보았을 것이다.
<햄릿>을 누가 무엇이라고 해석하든 그것은 자의식의 비극이다.
<햄릿>의 진정한 비극은 그의 숙부가 그의 아버지를 독살하고 왕위와 함께 그의 어머니를 아내로 삼았다는 외부적 조건보다도, 그와 같은 사정을 알고도 자기의 행동을 결정할 수 없었던 <햄릿> 자신의 불안한 회의적인 내부적 조건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날개>의 자의식의 과잉은 <햄릿>의 현대적 발전이라고 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절망적 상황 속에 처한 고민하는 정신의 표현이 작품의 주조였으나, 이 근대판 <햄릿>인 <날개>에서는 그와 같은 고민하는 정신보다는 "세상이 싱거워서 못살겠다" 라는 권태의 정신이 더 많이 표현되어져 있다.
이것은 무슨 까닭에서일까? <날개>의 주인공은 그와 같은 고민에 대해서까지도 스스로 비판하는 자각을 가진 때문이다. 근대인의 자아비판은 이처럼 자신의 심층부에까지 투입되어진 것이다.
이 작품이 그 방법에 있어서 심리 분석주의적 방향을 띈 것은 이 때문이며, 이상의 문학을 자의식의 해부 또는 심리 분석주의 라고 일컷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학사적 견해로 볼 때 이상의 존재는 지극히 중요하다. 특이한 주목을 받은 이상이 시에 있어서나 소설에 있어서나 반드시 훌룡한 가치를 창조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일단의 무리들이 그의 도무지 해독할 수 없을, 그 알 수 없는 난해한 시를 뭐라 칭찬을 하든, 공박하든을 떠나 그의 시는 표현의 정상적인 완전성을 얻지 못한 것이며, 그의 시보다도 오히려 그의 소설이 훨씬 우수하고 가치가 있는 셈이지만 그의 소설도 그의 시보다 좀 더 성공했을 뿐이다.
진정으로 그의 문장적 재능이 가장 비상하게 성공한 것은 문학적 화제에서는 별로 그 대상이 되지 못하였던 그의 수필에서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훌룡한 에세이스트였다. 그러나 그의 시와 소설이 설령 하나의 실패의 문학이었다 치더라도 그 실패는 가장 영광스러운 그 무엇이 되어져 있다.
그것은 그가 우리의 신문학이 지닌 근대 문학적 성격을 현대문학적 성격으로 전환시키는 데 전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상이라는 작가가 우리 문단에 등장한 때가 1930년대 전후라는 것은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1930년대, 좀 더 정확히 말해 1935년을 전후한 시기는 우리나라 문학사상 중요한 한 전환기가 이루워 졌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전환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그것은 그 무렵부터 현대 문학적인 성격을 갖춘 문학이 나타난 것을 말한다.
갑오 개혁부터 1920년대까지 우리의 문학사를 지배해 온 문학의 주류 또는 그 성격은 분명히 근대 문학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20년대 이전의 것들에 비교적 고대 문학적인 요소나 성격이 그대로 잔재되어 있었다면, 20년대에 들어와서는 비교적 근대 문학적 성격을 갖추워 보려는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낭만주의니 자연주의니 상징주의니 하는 서구의 근대 문예사조가 이 땅을 휩쓴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였다. 그러나 30년대에 들어가서는 그러한 종전의 근대 문학적 성격이 현대 문학적 성격으로 변용 또는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종전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던 그 현대 문학적 성격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문학의 시대적 성격은 여러가지 각도로 논의될 수 있으나, 가령 고대 소설과 근대 소설과의 차이점을 들어 본다면
1) 전자는 주로 신화나 전설을 취재한 데에 비해 후자는 주로 실재의 현실에서 취재하려는 경향,
2) 전자는 율문적인데 비해 후자는 산문이라는 점,
3) 전자는 설화체인 데 비해 후자는 묘사체라는 점,
4) 전자는 진행적 구성인 데 비해 후자는 분석적이라는 점,
5) 전자는 주제가 교훈적(흔히 권선징악이라고 불림)인데 비해, 후자는 현실이라는 점,
6)전자에 등장하는 인물이 주로 선악의 대표자 또는 집단의 대변인인 데 비해, 후자에 등장하는 인물은 주로 성격이나 개성의 대표자라는 점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것은 전자의 고대 문학적 성격과 후자의 근대 문학적 성격을 설명해 주는 구체적인 내용들이다. 이것은 또한 근대 문학이라 할 때 그것은 반드시 근대에 나타난 문학이란 의미라기 보다는 근대적 성격의 문학이란 의미가 더 중요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각도에서 근대 문학적 성격과 현대 문학적 성격을 구별해 본다면
1) 전자가 주정적, 청각적 요소가 강하다면, 후자는 그보다는 주지적,시각적 요소가 강하며,
2)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개인이라면 후자의 그것은 개별자 또는 단독자라는 점,
3) 전자가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 기초되어져 있다면, 후자는 그보다는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가 더 중요한 설정이 되어 있으며,
4) 전자가 시간적 공간적 의식이 명료한 데에 비해 후자는 그보다는 그것이 혼돈되어 있으며,
5) 전자의 주제의 초점이 운명에 관한 문제라면 후자는 그보다는 존재의 문제에 더 집중되어 있으며,
6) 전자가 의식 세계에 주력하고 있다면 후자는 그보다는 무의식 또는 전의식의 세계에 더 많이 주력되어 있다란 점 등등을 지적할 수 있다 하겠다
이러한 현대 문학적 성격의 것은 제임스 조이스나 프로스트 등에 의해서 신 심리주의, 심리 분석주의, 내적 독백 또는 의식의 흐름 등의 이름으로 서구에서는 1915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 대두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이스나 프로스트가 이를테면 서구에서는 현대문학의 선구자라 한다면, 이상은 그런 의미에서 이 땅에 나타난 최초의 현대 문학적 성격의 작가였었던 것이다.
이상이 이 땅의 최초의 현대문학적 성격의 작가였다는 것은 먼저 그 주지적 성격에서 들 수 있겠다. 그의 주지적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그의 시에서다.
그의 시가 흔히 난해시의 대표적인 것으로 곧잘 인용되지만, 그것이 난해한 이유는 그의 시가 언어 조직을 감정적 질서 위에 두지 않고 특수한 지적 구조 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며, 시의 내용 역시 감정이나 정서 위에 쌓지 않고, 지적 세계 위에 시어의 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지적인 것이 난해하다라는 것과 직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의 시가 난해한 것은 이상의 지적 뇌력의 구조가 아주 특수한 데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특수성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바로 주관적인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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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 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4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5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6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7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8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9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10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1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1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1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13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정은 없는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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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글은 이상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오감도>> 속에 있는 <시제1호> 작품 전문이다.
이 작품을 읽고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혹은 이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의미와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이 작품이 난해한 원인은 그가 사용한 용어나 단어에 있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이 시에서 구사한 흔히 시어를 살펴 보면 제1,제2,...,제13,아해,도로,질주,길,골목,무섭다,사정,적당 등등과 같은 용어들은 누구든지 다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상어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가장 쉬운 일상어로써 성립된 각 귀절 또한 누구든지 다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내용의 문장들로 구성되어져 있다.
"십삼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라든지,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등의 문장들은 조금도 우리의 이해를 난해하거나 방해하는 용어나 부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우리의 이해를 난해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작품에 사용된 용어나 문장 각 귀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용어와 문장으로써 조직되고 구성된 이 작품의 전체적인 내용과 의미가 난해하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독자들이 이 시가 난해하다!?! 란 의문부호(?)를 갖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작가가 어떤 의미와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십삼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라든지,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라는 의미와 귀절을 사용하고 있는 지를 도대체 알 수 없게끔 전체적인 시로 쓴것인지 그 목적을 알 수 없는 끔 한데서 기인된다.
이러한 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문장도나 시의 정도와는 상반되는 것들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전체적인 의미나 내용보다 그것을 개인적 특수한 지적 구조적인 기초 위에서 단지 표현하기 위한 지엽적인 부분만의 완전성을 얻었을 뿐, 어떤 문장이나 시의 근본적인 의도인 전체적인 통일된 의미나 내용면에선 완전한 표현을 얻지 못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증요한 것은 언제나 전체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데 난해한 지엽적 각 부분의 완성이란 역시 정상적인 문장도나 시의 정도라고는 볼 수 없다란 점이다. 영국의 문장 심리학자인 조오지 세스의 말에 의한다면, 이런 주객이 전도된 시의 형태가 바로 현대시의 한 특징이며, 이러한 것은 문장의 <통사적>인 방법에 대한 문장의 <해사적> 방법이며, 다른 한편으로 유명한 심리학자인 프로이트의 설에 의한다면 문장의 <현실원리>에 대한 <쾌락원리>의 표현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즉, 이상의 <쾌락원리>가 주관적이며 그 방법이 특수한 데 바로 이 시의 난해한 원인이 있다란 점이다. 방법은 그 특수성을 이해하면 다 해결된다고 치더라 하여도 그의 독자적이며 주관적인 그 <쾌락원리>는 바로 정신의 문제가 되므로 누구나 그것에 동화하거나 동질의 것이 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그의 난해성이 있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그의 쾌락원리와 방법을 배후에서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상의 감정이나 정서적 질서가 아니고 바로 그의 지성인 것이다.
이상이
한국최초의 현대문학적 성격의 작가라는 그 둘째의 이유는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그러한 인물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주제의 초점이 바로 개인 대 사회와의 관계 또는 타인과 자기와의 관계이기보다는 늘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초점이 집중되어져 있다란 점에서이다.
그의 소설 <날개> 속에는 외형적 조건으로 나와 아내와의 관계인 것처럼 취급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작품에 있어 나와 아내는 각각 독립된 인간이기 보다는 한 인간의 두 가지 면이 한 쪽으로는 나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로써 나타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를테면 한 인물의 두 개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즉, 한 인물의 정신인 나와 육체인 아내가, 또는 한 인물의 사고인 나와 행동인 아내가, 거저 공원 주변이나 하염없이 배회하는 페인적 존재로의 나와 무능력한 남편을 의지할 수 없어 매춘이라는 생활방식을 택한 아내로의 그 이상한 동거 생활방식에서의 두 인물의 성격묘사를 통하여 제기되는 여타 자의식과 무의식의 흐름등이 잘 묘사되어져 있는 것이다.
또한 <실화>라는 그의 다른 소설 을 살펴 본다면 거기에선 <나>,<너>, <이상>이라는 세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즉, 거기에서 <나>는 바로 이상 자신이 느끼는 <나>이며, <너>는 이상이 자기를 남처럼 바라다 보는 <너>인 것이며, <이상>은 제3자인 입장에서 바라다 보는 <이상>인 것이다.
그러니까 형식 상으로는 <나>,<너>, <이상> 세 인물이지만 본질적으론 한 인물인 것이다.
결국 <나>는 독백이나 자의식 또는 무의식을 묘사하게 되며, <너>에선 일상적인 행동 표출이나 대사로 그 심경을 발설하게 되며 <이상>으로선 그렇게 일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한 스스로의 자해석을 가할 수 있는 ... 이처럼 늘 이상은 결국엔 자기와 자기 스스로의 관계만이 그 중심 테마가 설정되어져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현대문학의 유력한 한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세번째의 이유는 이상은 작품을 통하여 의식의 세계이기보다는 무의식 또는 전의식을 묘사하려 한다는 데 있다.
<날개>의 주인공인 <나>가 그의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서 추구하고 있는 세계, 또는 <실화> 속에 등장시킨 <나>,<너>, <이상>이란 세 인물의 관계를 통해 추구하고 있는 세계는 상식적 보편적 세계 속에 나타나지 않은 잠재적, 무의식 또는 전의식의 세계는 의식적인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아주 특이한 독자성을 띄게 된다.
그러나 이상의 그 특이한 독자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아니라, 누구나의 무의식 또는 전의식의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단독적이며 개별 실존적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전의식 또는 무의식의 추구는 전기한 조이스나 프로스트라는 작가가 추구했던 근대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대소설의 한 특징이 아닌가 보인다.
그 네번째는 바로 단독자의 등장이다
근대 소설의 등장인물은 그것이 대개 한 성격의 대표자로써 또는 개인의 전형으로 제시된다. 그 경우 그 개인이 아무리 특이해도 보편적인 인간의 하나이다.
그러나 현대소설에는 단독자, 개별자, 예외자 다시 말해 아웃사이더 등으로 불리어 질 수 있는 조금도 보편적인 인간이 아닌 단독자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특성이다.
이상의 소설 속에 나타난 인물 역시 그렇다. <날개>나 <실화>의 인물들은 보편적 인간에 가까운 것이기 보다는 휠씬 더 많이 단독자 또는 개별자에 가깝다.
쉽게 공통된 인간을 찾을 수 없는 그 인물의 특이한 고독과 생활과 그 생리가 그걸 잘 말해 주고 있다.
<날개>에서 <나>란 주인공은 <아내> 와 아랫방 웃방에 나눠 살면서 아내의 통정이나 작부짓을 수수방관 내지는 방조하며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을 모이처럼 먹고 잠만 잔다. 기왕지사 아내가 천천히 죽으라고 수면제를 장기 다량 투약한 사실을 발견하고도 공원을 배회하는 아웃사이더 일 뿐이다.
나중엔 아내의 통정을 현장에서 발각하고도 왜 때를 잘못 맞춰 방문을 열었느냐고 오히려 두둘겨 맞기까지 한다.
이러한 상황 설정은 일상적인 사회 통념으로선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는 내용들이 아니겠는가 말이지만 이상이라는 특이한 무의식 세계 속에 설정된 한 인물에서 도출될 수 있는 두 가지 양태의 분열적 성격 측면으로 해석하자면, 즉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에서처럼 한 인간의 두 가지 양상에 대한 묘사를 염두에 둔 실험작이라는 해사적 단서를 알고 나서는 아주 묘한 감흥이 일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한 현대소설의 설정 그 구성 등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었던 1930년대에 혼연히 창작했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상의 천재성은 충족한 것이리라.
이상에게서 현대문학의 특성을 포착할 수 있는 그 바로 다섯번째의 단서는 시간의식 또는 공간의식이 전혀 무시되어져 있다란 점에서다.
대개 근대소설에서는 그것들이 명료하다. 어느 때 어느장소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현대성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을 갖게 된다. 그러나 조이스나 프로스트의 경우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무시되어져 있다. 과거와 현재가 명확한 구분없이 서로 혼착되어져 있는가 하면, 어떤 장면에서는 그 곳에 등장한 인물이 몇 사람인가에도 인색할 정도다. 이것은 바로 시공간장을 초월하여 실존적 인간의 존재를 더 중시한 측면으로 볼 수 있겠는데, 이러한 것도 현대소설의 양태의 하나로써 공간 묘사를 무시, 초월한다는 특질에서 흔히 "4차원적 문장"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몇몇 현대 문학이 갖는 특징을 이상의 작품을 통해서 점검해 본 바, 1935년을 전후해 이상이라는 작가를 통해서 우리의 신문학은 종전의 근대 문학에서 처음으로 현대문학적 성격에로의 전환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무렵에 최재서나 김기림 등에 의한 주지주의적 모던이즘 경향 등 현대문학 운동이 전혀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허나 전자는 주로 영국의 주지주의 문학을 소개하는 정도였으며, 후자는 이론적 주장과 함께 시에서 이를 실험하여 새로운 관심을 갖게는 하였으나 현대 문학이 지닌 여러가지 특성을 소설 속에 아주 깊숙히 반영시킨 사람은 거의 이상 뿐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설이 차지하고 있는 문단적, 문학적 비중을 견주어 본다면, 그리고 그의 비상한 문학적 성공을 겸해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신문학을 현대문학적 성격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데 이상이 끼친 영향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중대하고 또한 결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컴퓨터 화일에 옮겨 실고 있는 와중에도 금강산 대북사업, 5억달러 대북 지원문제, 150억 비자금설 파동과 4.13 총선과 관련된 민주당 권 고문과 현대와의 연루설 현대 현대 현대!!! 그리고 현대가 처음 경부 고속도로를 착공하려 했을 때의 반대와 데모 그리고 그 후 눈부신 조국의 근대화 건설 우울증 내지는 조울증에 걸려버린 대북사업의 총책 정몽헌씨의 투신 자살 금강산에 추모비 건립 그리고 금강산 관광 재개 소식들 ...등의 근착 발 새소식들이 오버랩되어져 옴을 읽거나 들으면서 ,,,,,,,,
이제나 죽어 그 언제까지라도 그 금강산 자락을 지킬 고 정몽헌 회장이나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아니할 한국의 현대문학의 큰 지평을 연 이상이거나 똑같이 현대! 현대!를 절규하며 부르짖다 한 사람은 나비가 되어 현해탄을 건너간 뒤 축 늘어진 뻔데기가 되어 동경 길바닥에서 객사했으며, 정몽헌 회장은 종로 그 부친이 지은 현대빌딩 본사 그 사옥 12층 창문 위에서 날개죽지를 펴고 추루~리리락 추락해 버렸으니, 어찌본다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인 측면에서나 조국의 현실에서 과연 현대를 염원하고 부르짖는다는 그 의미가 아직은 서글프고 좀 야릇한 감흥이 이는 것 또한 사실인 것만은 틀림없는 암울한 시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할 노릇이라 아니할 수도 없는 총제적 형국이라 할 것이다.
현대 현대 현대 이기미 쓰벌 지화자나 부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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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시인의 시 " 건축무한육면각체 " 김흥년 매혹 주간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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