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의 세계]-
노예 검투사가 억압에 맞선 영웅으로 변신한 까닭
지난 21일 13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시청률 2%만 넘어도 성공인 케이블 방송에서 시청률 4%를 넘어서기도 했다.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방영 내내 시청률 2% 이상이었고 케이블과 위성TV를 통틀어 줄곧
시청률 1위를 지켰다.
로마시대의 모든 공공건물들은 노예들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예를 들자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하드리아누스의 목욕탕, 방벽,
도서관이나 각종 수도교, 또한 콜로세움등과 원로원 건물 같은
모든 공공시설 및 건물은 노예들을 동원되었다.
그 외에도 채석장이나 검투경기, 모의 해전 및 전차경주,
맹수와의 싸움등에도 노예가 이용되기도 한다.
지금으로 치면 3D직종이나 단순노무직등의 일들은 로마시민 대신에 모두
노예들이 도맡아 한 셈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3D 직종을 사람들이 많이 꺼려 동남아나 중국, 네팔
등지에서 온 외지인들이 일을 많이 한다고 한다.
한편 그리스 등지에서 잡혀온 노예들 중 일부는 학력수준이 높아
가정교사, 집사 등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
참고로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은 이집트 노예들이 건설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건설 된 것이라고 한다.
드라마의 인기는 역사적 배경인 로마 공화정 말기에 대한 관심도 끌어올렸다.
주인공은 기원전 73년 동료 노예와 함께 탈출해 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다.
많은 역사가가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킨 이후의 삶을 조명했다.
70여명의 검투사 노예를 이끌고 훈련소를 탈출한 스파르타쿠스는
제국 로마의 정규군을 잇달아 격파했다.
그를 따르는 세력이 한때 12만명에 달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난은 기원전 71년 로마의 크라수스 군단에 패하면서 끝났다.
이때 잡힌 6000여명의 반란군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이에 따른 전설이 계속 생겨났다.
로마 공화정 말기는 노예제도가 극에 달하던 시기다.
연이은 정복전쟁에서 포로로 잡아들인 노예가 넘쳐나
가축값보다 낮게 거래되기도 했다.
노예 서너명이 로마시민 1명을 부양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로마 경제를 노예제도가 지탱했다.
드라마도 스파르타쿠스로 대표되는 노예들과 이들을 소유한
지배계층 간 대립구도로 진행된다.
연출가가 로마사 전문가 자문을 구했다곤 하지만 '옥에 티'는 꽤 있다.
한 예로 검투사 훈련장의 주인 바티아투스가
100 데나리우스(옛 로마의 은화)에 노예 6명을 사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당시 노예 가격은 평균 960데나리우스에서
4000데나리우스였다. 1 데나리우스는 노동자 하루 품삯 정도다.
아주 헐값이라도 75데나리우스 이상이기에100데나리우스에
6명을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검투사 노예 소유주에 불과한 바티아투스가
로마 정치인을 꿈꾸는 드라마 설정도 실제 역사에선 불가능한 상황이다.
- ▲ 검투사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장면으로 미드‘스파르타쿠스’는 막을 내렸다. 방송시간이 심야임에도 즐겨보는 청소년들이 많아 등급제 실효성이 논란이 됐다. OCN 제공
물 위에 꽃잎이 떠 있는데 당시엔 장식 용도라기보다는 물을 정화하는 기능을 했다.
귀족들은 집안을 예술품으로 장식하길 즐겼는데
조각가를 불러 상(像)을 만들기엔 돈이 꽤 들었다.
이때 대안으로 쓴 게 여자 노예들이다.
몸 전체를 회색으로 칠해 장식품처럼 세워놓았다.
당시 검투사 노예들은 로마와의 전투에서 진
고대 이탈리아 삼늄, 갈리아, 트라키아의 전쟁포로였다.
개중에는 노예가 아닌데도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자진해서
검투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피를 뿜어내는 검투사들의 대결은 대개 장례 이벤트의 하나로 열렸다.
드라마 마지막 편에선 검투사 동료인 크릭수스와 대결을 벌이던
스파르타쿠스가 무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무기가 아닌 부엌용 칼과 쇠꼬챙이를 들고 싸웠다.
크릭수스도 실존 인물이다.
스파르타쿠스와 함께 반란군을 이끌던 그는 훗날 부하를 데리고
따로 떠나 반란세력이 약화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드라마에서도 역사서에서도 스파르타쿠스는 영리하고 리더십있는 지도자로 묘사된다.
노예는 야만인으로 취급되던 당시에 유독 스파르타쿠스만 박식하고
지적인 인물로 그려진 이유는 뭘까. 로마인들의 자기 합리화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많다. 스파르타쿠스는 6개 로마군단을 차례로 깨뜨렸다.
문명을 자랑하는 로마가 야만인 노예들에게 지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역사가들이 "스파르타쿠스가 한때 로마 군대의 일원이었고
여기서 교육받아 로마인처럼 문명화됐다"는 점을 부각했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난이 끝난 지 100여년 후에 역사가 플루타르코스가
그렇게 묘사했고 서기 2세기 중반의 역사가들도 그랬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 노예에 반란군 우두머리임에도
로마군을 이긴 존경할만한 인물로 그려졌고 지금은 지배층의 억압에 맞선
인물로 꼽히고 있다.
로마제국을 뒤흔든 스파르타쿠스의 난은 노예 처우 개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또 노예노동에 기초를 둔 토지소유제도가 소작농 중심으로 바뀌는 계기도 됐다.
이에 비해 최근 종영한 미드 '스파르타쿠스'는 "'19세 이상 관람가'라는
등급제가 과연 실효성이 있느냐"는 논란을 남겼다.
ⓒ 조선일보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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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의 신분으로 부정부패의 폭정을 타파하려 일어난 홍길동
무언가 통하는 코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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