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6일 토요일

8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 실패와 3차에 걸친 징기스칸 서정(西征)

KBS TV - 칭기스칸 프로그램



러가지 어려운 경제적 난관에 봉착해 있었던 십자군 결성 이전 당시의 모든 서방 제국의 시민들과 농민 그리고  기사와 제후, 심지어 교황에 이르기까지 동방 페르시아 제국의 엄청난 부귀와 여러 물산에 관한 소문을 들으면서 그들과 독점적 상거래를 해 온 동방의 심장부라 할 수 있을 콘스탄티노플 거상들과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던 서방의 중견 거상들은 제후와 교황을 부축여 결국 십자군 원정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동방에 관한 근거도 없는 환상과 기대감에 맞물려 1차 십자군 원정을 시도한 십자군 원정대는 그 후로도 8차에 걸쳐 줄기차게 이뤄 지는데, 결국 예루살렘 성지 회복과 예수 그리스도 무덤의 발견이란 십자군의 염원은 결국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 버리고 마는데, 바로 그 즈음에 공교롭게도 혜성과 같이 먼 동방 대 초원으로부터 발 빠른 초랑말을 이끌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전 유럽과 동방 여러 나라를 거침없이 침공해 오는 민족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골군 기마족이었다.

 

 

그들은 유럽 기사들의 일반적인 상징인 철제 비늘 갑옷과 두 눈만 나온 철제 투구와 보호막으로 둘러싼 기마를 탄 채 신속한 공격을 하지 못하고, 둔한 움직임을 보이는 유럽 기마에 올라탄 기사들에 비해, 혈족이 중심으로 된 조직력과 발빠르고 기동성이 아주 신속한 기마병을 주축으로 모든 선진 유럽군을 완전히 제압하면서 전 유럽과 동방 여러 나라를 3차에 걸쳐 완전 초토화 하기에 이른다.

 

몽골군은 인정사정이 없었으며 정복 후 모든 남자들을 살육하였으며,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 넘기면서 결국 전 유럽과 동방 쪽 모든 주민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공포와 저주 어린 깊은 원한의 골과 상처를 남기고 만다.

 

기실 로마제국의 카이사르 군대는 일찍이 지금의 독일 땅인 갈리아 지역을 정복한 뒤 주민 동화 정책을 펼쳐 오히려 나중에 그네들이 로마 군대의 막강한 기마 군단병이 된 사실에서 본 바와 같이,  피 정복자들을 잘 포용하며 다스리던 로마의 동화정책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공격이 완료된 그 즉시 도시 기반시설 전체의 완전 파괴와 주민 모두의 도륙이란 가공할 공포 정책을 펼친 결과, 몽고군은 로마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시간에 그 웅대한 세력이 다시 사막에 잠깐 내리치는 폭풍우와 같이 소리 소문 없이 그 스스로 소멸되어 버리고 마는, 정치적 실책을 범하게 된다.

 

결국 몽골인들은 로마인들과는 달리 침공의 전략은 알되 정복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지 못했으며, 정복한 뒤 자신들의 문화권 안으로 동화시켜 나가는 리더쉽에 걸맞는 문화 수준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였기에 그들의 침략은 침략이란 행위 자체로 만족할 수 밖에 없을 아쉬움을 역사서에 남기고 서서히 쇠락해 버리고 만다.

 

 

‘황화’(黃禍)에 떨게 한 몽골의 3차 서쪽 정벌 
                       “서쪽으로” 몽골군의 가공스런 기개로 유럽 심장부 혼비백산


몽골 서정군의 행렬 모습.

첸헤르 온천 휴양지 입구에 설치된 몽골 서정군의 대형 이동지휘부 조형물을 보면서 다들 그 서정(西征, 서쪽을 향한 원정)이 궁금했다.

물론 역사책이나 영상물 등을 통해 대충 알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 특히 서정의 발발 원인이나 가능성 및 평가문제에서는 의문시되거나 아리송한 점이 적잖다.

그래서 바쁜 걸음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그 조형물을 배경으로 서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세계 속의 몽골이나 중세의 세계질서를 언급할 때 몽골군의 서정은 늘 화제의 중심에 떠오른다.

초원의 패자가 된 신흥 몽골제국은 40여년(1219~1260)간 세 차례에 걸쳐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서정을 단행했다. 서정의 표면적 이유(동인)는 1219년 인접국 호레즘의 오트라르에 파견된 몽골 통상 사절단이 피살된 이른바 ‘오트라르 사건’이지만, 그 근본 원인은 아무래도 이 제국의 건국이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칭기즈칸과 그 자손들을 비롯한 제국의 건국자들은 정치적으로 세계대동주의(大同主義)를 제창함으로써 정복욕에 불탔고, 경제적으로 유목국가로서의 숙명적인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추구함으로써 상업욕을 충족시키고자 했으며, 문화적으로 개방주의를 표방함으로써 교류와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이와 더불어 군사적으로는 유목기마민족의 본능대로 기동력이 뛰어난 무적의 기마군단을 보유함으로써 원정에 자신감을 가질 수가 있었다.

이러한 제반 요인에 의해 가동된 몽골의 세 차례 서정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전개되었다.

제1차 서정(1219~1225)은 칭기즈칸이 직접 이끈 중앙아시아 원정으로서 ‘칭기즈칸 서정’이라고 한다. 20만 대군을 이끈 칭기즈칸의 진두지휘 하에 네 아들이 다 가담한 전광석화 같은 진격 앞에 호레즘은 맥없이 무너지고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같은 고도도 일시에 서정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칭기즈칸은 귀국길에 서하(西夏)를 멸하고 나서 불의에 생을 마감한다.

제2차 서정(1235~1244)은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차남인 바투의 통솔하에 50만 대군이 투입된 유럽 원정으로서 ‘바투 서정’이라고 한다. 맏아들을 출정시키면 ‘인마(人馬)가 늘어나고 위세가 높아진다’는 칭기즈칸의 차남 차가타이의 제언에 따라 4남의 장자들뿐만 아니라 기타 제후와 부마들의 장자들까지도 동참한다. 그래서 이 서정을 ‘장자 서정’이라고도 한다. 서정군은 3년도 채 안 되어 모스크바 공국을 비롯한 러시아 주요 지역을 점령한다. 세 갈래로 나뉜 서정군은 각각 오늘의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를 공략하고 오스트리아를 지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까지 진출, 유럽의 심장부에 이른다. 우구데이 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하는 길에 바투는 볼가강 하류 일원에 킵차크 칸국을 세웠다.

말 털로 만든 흑백기. 백기는 평화시를, 흑기는 전시를 상징한다.

 
제3차 서정(1253~1260)은 칭기즈칸의 4남 톨루이의 차남인 홀레구의 지휘하에 진행된 서아시아 정벌로서 ‘홀레구 서정’이라고 한다. 서정군은 카스피해 남부에 있는 이란 지역을 평정한 다음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메카와 예루살렘에 이어 다마스쿠스를 점령한다. 형 몽케 칸이 송과의 전장에서 진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하다가 이란을 중심으로 한 일원에 일 칸국을 건국했다.

이것이 인류역사상 3대 군사원정의 하나로 꼽히는 몽골의 서정이다. 몽골의 서정하면 우선 떠오르는 의문이 수적으로도 얼마 되지 않은 ‘후진’ 유목민이 어떻게 그 방대한 영토 위에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선진’ 정착 농경민사회를 공략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인구로 보면, 칭기즈칸이 1206년 몽골제국을 선포할 당시 천호를 단위로 한 집단이 약 95개였다고 하니 인구수는 어림잡아 50만명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몽골제국이 합쳐서 인구 1억명을 가진 금나라나 송나라를 제압했으니, 그 즈음 몽골 인구가 배(100만명)로 늘어났다고 가정하더라도 1 대 100의 비율이 되는 셈이다. 정말 인구로 말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등하지만 1 당 100의 기세로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대적했던 것이다. 그리고 뭉뚱그려서 정착농경은 선진이고 유목은 후진이라고 편단하면서 전쟁의 승패를 논하는 것은 비역사적인 단순논리다. 역사에는 유목민이 농경민을 압도한 예가 수두룩하다. 몽골 유목민들로 말하면,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그 어느 곳도 따라잡지 못한 우수한 사회적 전범(典範)과 도덕률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몽골제국은 웅비할 수 있었으며, 서정으로 일세를 풍미할 수 있었다.

 

 

서구인들이 그렇게 자랑해 온 시민참여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그리스의 아고라나 로마의 포럼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그 시대에 몽골 유목민들은 그것들을 능가하는 코릴타(국가의 대사를 토의 결정하는 족장 등 지도자들의 모임)로 다민족 사회의 통합을 이루고 거국적 사업에 힘을 모아갔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 ‘노인과 가난한 사람을 정성껏 돌봐 주어라’ ‘모든 종교를 차별 없이 존중해야 한다’ ‘대칸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경칭 대신 이름을 불러라’ ‘간통한 자와 고의로 거짓말을 한 자, 물에 오줌을 눈 자는 사형에 처한다’ 등등 사회계약인 칭기즈칸의 예케 자사크(대법령)에 의해 몽골사회는 규율과 도덕, 친화력, 그리고 비전으로 똘똘 뭉쳤다. 칭기즈칸은 이 대법령의 준수를 이렇게 간절히 호소한다. “이후 태어날 수많은 칸들과 그 후예들, 노얀(지도층 인물)들과 전사들이여! 예케 자사크를 지니지 않는다면 제국은 멸망할 것이다. 그때 가서 나 칭기즈칸을 불러도 소용이 없다.”

긴급시 사용하는 역참이용허가패인 영패(令牌).

몽골제국이 서정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회적 요인과 더불어 탁월한 기마전술에 바탕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연한 군사운영체계와 영활한 전략전술, 우수한 장비와 무기에 의해 원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한다.

대외원정일 경우 적어도 2년간의 의견수렴과 코릴타의 최종 결정 등 준비를 걸쳐 수행하며, 전투에는 ‘용사(바이토르) 군단’ 같은 저승사자군단들이 최선봉에서 전투를 이끈다.
놀라운 사실은 <원사>의 기록에 의하면, 전투시 군사보급체계로서 ‘아오로크’라는 이동병참기지가 동원되는데, 이 기지가 필요로 하는 일체 군수품은 병사들 스스로가 부담한다. 이렇게 군사를 양성하는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키기도 쉽고 또 수도 넉넉히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파격적인 군사보급체계다.

그밖에 서정을 단행해 일약 초원의 제국을 세계의 제국으로 변모시킨 주요인의 하나로 ‘사건창조적 인물’(위인)인 칭기즈칸을 비롯한 대칸들의 탁월한 지휘 능력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지휘 능력은 믿음과 충성에 바탕한 친화력과 통합력, 그리고 결단력의 소산이다.
칭기즈칸의 지도자 됨됨이를 여러 면에서 엿볼 수 있지만, 여기선 보기 드문 한 가지만을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는 평생 토사구팽(兎死狗烹, 일이 성공된 뒤에는 그 일을 위해 애쓴 사람을 버린다)한 일이 없는 의리의 사나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를 배신하는 졸부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주위에는 애칭으로 ‘맹견’과 ‘준마’로 불리는 각각 4명의 장군이 있었다.

그들은 일편단심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고, 주인은 그들과 끝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해왔다. 그중 준마 모칼리는 고려 출신이라는 일설이 있다. 토사구팽과 배신을 식은 죽 먹듯하는 이 난세에 귀감으로 삼고 곱씹어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몽골의 3차례 서정에 의해 생겨난 엄청난 세계적 변화를 후세 역사가들은 ‘팍스 몽골리카’라는 한 마디로 개괄한다. 이 말은 ‘몽골의 평화’라는 뜻으로서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에서 따온 말이다. 그런데 그 해석을 두고는 엇갈린 주장이 있다. 어떤 이는 마치 ‘평화’라고 해서 서정을 통해 이루어진 몽골제국 시대에 전쟁은 없이 그저 평화만이 감돈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일본의 한 역사가는 서정 몽골군이 자행했다고 하는 살육이나 파괴는 사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미지로 비쳐지게 된 것은 ‘뛰어난 자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엉뚱한 해석을 내놓는다.

‘신의 채찍’으로 자부한 몽골 서정군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100만명을, 이란의 니샤푸르에서 170만명을, 바그다드에서 1주일간 80만명을 살육하고 도시를 전소했다는 이슬람 측 기록이 좀 과장은 있을망정 무근거한 날조는 아니다.

전쟁, 그것도 유목민이 치르는 전쟁에 살육과 파괴, 약탈이 수반한다는 것은 일종의 상규(常規)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팍스 몽골리카’를 운운하는 것은 이 서정으로 인해 13~14세기 유라시아 대륙에 몽골 주도하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통일적인 몽골제국의 관할하에 역참제도(驛站制度)를 비롯한 동서간의 정연한 교통체계와 소통구조가 구축됨으로써 각이한 문명간의 교류와 만남이 범세계적으로 촉진될 수 있게 한 그러한 새로운 국제질서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백마를 탄 칭기즈칸(벽걸이 모사도).

그러나 이러한 국제질서가 평온한 것만은 아니었다. 제2차 서정에서 몽골군이 유럽 심장부에 진출한 것은 유럽 세계에 커다란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혼비백산한 유럽인들은 내침한 몽골인들을 라틴어에서 ‘지옥’을 뜻하는 ‘타르타르’에 빗대어 ‘타타르’라고 비하하면서 불안과 증오에 치를 떨었다. 로마 교황은 각국에 친서를 보내 공동항전을 호소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안과 증오가 후일 동양에 대한 서양인들의 인종적 시기를 대변하고 부추기는 ‘황화’(黃禍, The Yellow Peril)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일찍이 5세기 전반 동방 흉노족의 후예인 훈족이 아틸라의 지휘하에 중부 유럽을 석권하고 훈제국을 세운다. 그 아틸라가 수백년이 지난 13세기부터 유럽의 문학작품에 사나운 맹장으로 등장한다. 1838년 영국의 허버트가 쓴 아틸라의 자전적 서사시인 <아틸라, 기독교의 승리>가 그 대표작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은 유럽인들의 피해의식을 반영해 훈족이나 아틸라를 흉포하고 잔인하며 비문명적인 동양인의 전형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편견선 상에서 1895년 독일 화가 헤르만은 황제 윌리엄 2세의 뜻을 받들어 <황화도>(黃禍圖)란 판화를 그린다.

정식 화명은 <유럽의 여러 민족들이여, 당신들의 신앙과 가정을 지킬지어다>이며, 작품은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바쳐진다. 내용은 손에 칼을 든 천사 미카일이 역시 손에 칼을 든 유럽인들에게 앞에 나타난 불상과 용을 무찔러 버리라고 호소한다. 불상과 용은 엄연히 동방의 상징물이므로 동방에 대한 증오와 보복을 선동하는 내용임이 분명하다. 그 후 ‘황화’의 망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주공간을 배회한다. 20세기 초 동방진출을 적극 추진해 오던 오스만제국이 1906년 일본 도쿄에서 범이슬람 세계대회를 개최하기로 일본과 합의하자 영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일제히 ‘ 신 황화 ’가 우려된다면서 대회를 무산시켰다.

 

근간에 미국 안보전략가 헌팅턴이 주장한 이른바 ‘ 문명 충돌론 ’은 ‘황화론’의 재판으로 보여진다. 그는 미래 세계에서 가장 위협적인 요인은 바야흐로 정체성을 되찾아가는 유교문명권과 이슬람문명권이므로 여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6개 문명권은 합종연횡해서 이 새로운 ‘ 황화 ’를 막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상대방으로부터 당한 재난을 헤아린다면, 동양이 서양보다 훨씬 혹심하다. 그렇다고 ‘ 백화 ’(白禍)로 맞불질 해봤댔자 인종을 적대시하는 악의 순환만 거듭될 뿐, 인류의 공생공영에는 결코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2009/6/10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몽골무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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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출처 :
http://mhnn.tistory.com/


. topten
http://seoultour.textcube.com/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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