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3일 토요일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

 서설 :
 
 나오미 작가는 로마제국 시대 중에서 3세기를 위기의 세기라 정의한다.
 
그녀는 이 시대를 로마 본래의 사고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전 세대와 구분하여, 눈 앞에 위기에 급급한 나머지 자기네의 본질마저 바꾼 결과, 
더욱 심각한 위기에 부닥칠 수 밖에 없었던 위기의 시대로 구별지어 설명한다.
 
일단 위기의 시대는 AD 211~ 337년 동안 크게 3등분하자면 
하기와 같다.
 
1단계: 
AD. 211 ~ 284년 간이며 211년 카라칼라 황제 즉위에서부터 284년 카리누스
황제까지 24명의 황제 난립.
 
2단계 : 
AD. 284 ~ 305년 21년간 디오클레이아누스 황제 통치.
 
마지막 3단계:
AD. 307 ~ 337년 동안 콘스탄티누스 황제 통치.
 
그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로마 지배층에 공인.
콘스탄니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제국 내에 기독교를 공인한 배경은 
점차 쇠락해 가는 국가혼돈 상황을 타파할 목적으로, 즉 기독교의
새로운 피로 수혈하면 다시 회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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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역사가나 연구자들은 3세기 시대의 
위기를 초래케 한 주요원인을 아래과 같이 추정한다.
 
. 제국 지도자 층의 질적 수준 저하
 
AD. 284년 카리누스 황제 까지 모두 24명의 황제가 스쳐간다.
그 중 암살이 14명, 자살 2명, 전사자 2명, 
전대미문의 전투 중 산 채로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 황제
도 나오고 (그는 페르시아 땅 감옥에서 옥사)
전염병에 걸려 죽은 황제도 있어서, 그를 포함해 병사로 2명
사고사가 1명 (카루스 황제는 군단 이동 중 벼락에 맞아 죽음)
 
이처럼 짧은 70여년의 시기 동안 무려 24명의 황제가 난립한다.
 
이 분석처럼 로마제국이 흔들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정국 불안정이었다.
 
원래 20만 정도의 병력으로 지난 300년 동안 그토록 광활한 
로마제국을 통치하고 평화를 구가했던 것은 신속히 군대이동을
가능케 해 준 로마가도 란 인프라가 존재했음을 간과하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제국의 변두리에서 중앙에 
있는 수도 로마까지 '중대 기밀이나 뉴스 정보' 가 전달되는데
한달 정도 걸린 2000년 전 옛날에 로마황제가 너무 자주 바뀌면서
정책의 지속성을 잃어 버린 것은 제국 통치에 심각한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 야만족의 침입 격화
 
척박한 황무지 땅이라고 먹을꺼리가 부족한 건 물론 아니었다.
 
원래 게르만 야만족들은 땅이 아니라 피로 그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는 생활방식에 젖어 토지를 잘 활용할 지 몰랐다.
 
그러나 갈리아 지역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이민족 포용 정책에 
힘입어, 숲과 늪으로 덮힌 그들의 땅을 개간하고 경작하기
시작했으며 아울러 정착에 성공하였다.
 
전통적으로 로마시민이 주축이 된 중무장 보병이 주력이었던 
3세기 이전에 반해 로마군대는 기마를 타고 신속히 이동하는
게르만 야만족을 대항키 위해 3세기 이후엔 기병전력이
주력군이 된다.
 
고트족들은 로마가도 길로만 다니는 군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가도를 피해 들과 산야를 넘나 들었으며, 아울러 
도나우 강의 강력한 국경 경계선을 피해 멀리 떨어진 흑해 쪽을
휘돌아 배를 탈취, 지금의 터키 쪽인 소아시아 방면을 공략하면서
에게해 쪽 그리스 아테네 방면 마저 공략하기 시작한다. 
 
즉 육상 침략에서 지중해를 뒤로 돌아 해적으로 전술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도나우 강을 계속 침략하려는 야만족을 회유하면서 그 지역
의 잦은 전란으로 인해 토지 황폐화와 인구감소를 염려한 나머지
로마황제는 고트족에게 대량 이주 정착을 허락하기에 이른다.
 
 
. 경제력 쇠퇴
 
게르만 북방 야만족들의 생존을 위한 집요한 침략으로 말마암아 
로마 정규 상비군의 군비 증가에 따른 재정적 파탄을 초래.
 
. 지식인 계급의 지적 능력 감퇴
 
 
 
. 안토니누스 칙령의 폐해
 
안토니누스 칙령은 세입의 기둥이었던 속주세를 폐지하여 
군사비 증가에 따른 재정악화를 해소한 것보다는 로마제국을
떠받치고 있던 선택된 로마시민이라는 자긍과 존재의 의미까지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였다.
 
. 기독교의 대두
 
그 당시 초대 기독교도들은 그네들만의 커뮤니티에 몰입하면서 
모든 속주민들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한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에 따른 로마 시민권을 취득받고도 로마시민의
기본적인 의무인 병역 의무와 납세를 완곡히 거절, 회피한다.
 
결국 로마제국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종교에 귀의하도록 300년 간에
걸친 고래심줄 같이 질긴 포교와 간절한 기도 그리고 주교란 교구
장치를 통해 로마제국 황제가 신의 임명에 의한 보편성을 부여받은
정통성을 취득하도록 로마 지배자들에게 신의 섭리가 임해서 권위를
부여받도록 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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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칼라 황제 의 안토니누스 칙령


비단 로마사 연구에 필생을 바친 
일본 여류 작가 나오미 씨의 말을 빌리지 않는다 하더래도 
위대한 제국의 흥망이겠거나 중흥기 그리고 또 쇠망에 있어서 
인류사에 독특한 특징을 남겨 준 로마문명이란 점에서 어떻게 왜? 
쇠망해 갔느냐 를 탐구하고 캐내기 이전에 총체적으로 로마사가 
흘러가는 그 전 과정을 눈여겨 보면서 인간 각자가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는 것인가에 관해서 객체적이며 진솔한 삶의 궤적을 
목도할 수도 있을 것인 즉슨 

예수 그리스도가 33세에 골고다 언덕에서 승천한 지 4년 후, 
로마 제국엔 선황 티베리우스에게 물려 받은 대적할 적이 없는 
평화로운 제국과 건전한 국가 재정으로 비롯된 막대한 흑자  
그리고 정규균 15만과 보조병 15만으로 구성된 막강 로마군이 
상비된 가운데 칼리굴라 황제가 즉위한다.

그는 4년여의 짧은 재위 기간동안 온갖 이벤트와 쑈로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갔으며, 결국 자기 근위병 장교에게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참극을 맞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앞서간 문명의 비교란 차제에 논의한다 치더라도 거대한 제국의 
발흥과 시민 각자각자 간에 살아 숨쉬며 민족 간의 전 동선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장중한 삶의 교향곡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우리 인간들이 왜 그렇게 살아가야 했는가? 에 대한 되삭임과 함께 
자기 스스로의 성찰을 해 볼 수도 있을 터

훈족의 무자비한 칼날을 피해 먹고 살 길 없어진 난민들로써 
자기 고향땅을 빼앗긴 북방 게르만 족은 차마 굶어 죽지 못하고 
먹고 살기 위해 다시 도적질과 약탈을 자행하면서 풍요와 평화를 
구가하던 로마 제국 산하의 제 시민들이 바라 볼 적에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행을 저지른 야만족이기도 하였다.

허나 그 누가 누구를 단죄 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돌고 돌아 
음지가 양지되듯, 그 야만족의 지배를 받으며 다시 오랜 세월을 
보낸 로마 제국의 각 시민들의 숨결 역시 역사 속에 녹아져 
도저히 흘러 내린채 멸문의 길로 뚜벅뿌벅 걷는 로마 제국의 
낡은 장화소리를 들으며 영원한 승자란 역사가 용납치 않는다는 
철리를 다시 새기면서 로마란 국격 스타일을 세우고 만들어 가는 
그 모든 과정과 박해에 몸서리 치던 기독교가 다신교를 숭배하던 
로마에 들어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도하면서  
시분초의 각 시공간을 채워 나가야 할 살아 있는 존재 객체의 한 
후세인 자격으로 오늘도 로마 제국 관련된 책을 뒤적거리며 
역사의 숨은 섭리와 엄숙한 시대의 손금을 가름해 본다.  


. 혈통에 집착한 로마 제국


인간은 일에 있어서건 매사 인생사에 있어서건 간에 안심할 수 있어야 
비로써 의욕이 생겨 나는 법이다.

중산층에 맞먹는 수입 보장 / 만기 제대 후 퇴직금 보장 
/ 자신의 혈육 아무 누구에게나 상속해 줄 수 있는 
위대한 로마 시민권의 취득 !

이 세가지 충족을 조건으로, 카이사르는 이민족이거나, 
출중한 노예들에게 로마군에 종군함으로써 자신의 생을 불태울 것을 
공개적으로 유혹(?)하였다.

로마사에서 초반 융성기를 맞이하는 
5반세기 동안 주로 해 왔던 일이 전쟁이 대부분이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현실 속에서 죽고 죽이는 전장을 포함한 
그 어떤 어려움이 존재하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 인물 밑에서 또는 그런 곳에 소속되어서 
자신의 땀과 열정을 솟아 붓는 법 인 듯 하다. 

또한 한가지 미리 첨언할 점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천년이나 더 명맥을 유지했던 동로마 제국의 군 전력이나 군인 자질 수준도 
결국 싸움에서 이기고 난 뒤 얻어내는 전리품이 있느냐 없느냐 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난데에도 그 원인이 있는 듯 하다.

무슨 이야기이냐면 동로마 제국과 맞닿는 곳에 위치한 
파르티아나 사산조 페르시아 왕국은 엄청난 부와 풍요로 넘치는 
땅이었지만, 그와 반대로 서로마 제국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고트족이나 반달족으로 지칭되는 게르만 족들은 결국 싸워서 이
겨봐야 먼지 밖에 얻을게 없을 북방계 야만(?)족 내지는 훈족이었다 란 점도
눈여겨 봐야 할 점인듯 여겨진다.


. 카라칼라 황제

여기 언급되는 카라칼라 황제는 
로마 제3대 황제인 칼리쿨라 황제(37-41년)와 이름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시대의 황제임을 먼저 숙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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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10배가 넘는 패자 갈리아 주민들을 그 1/10~1/20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다스리기 위한 기막힌 포용 철학을 펼친 위대한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도 그의 전략은 그대로 살아 팍스 로마나 시대를 
여는 명약이 되었던 덕분에 지중해를 둘러싼 거대한 로마제국은 성립될 수 있었다.”

거대한 로마 역사 담론의 대가이자 '로마인 이야기' 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문화적 포용 그리고 개방성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다. 

특히 로마가 공화정에서 벗어나 제국으로 변화를 시도한 시점을 생각하면 
로마는 이상하리만큼 집착과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로마는 혈통적으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집착했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같은 천재적인 영웅을 경험한 로마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과의 인연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의 로마 제국의 최고 지도자의 조건을 
너무 쉽게 규정해 버렸고,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혈통관계를 
인위적으로라도 만드는 작업이 생겼다.

로마 황제가 되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를 입증해야 통치의 카리스마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칼리쿨라가 검증되지 않은 후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환영한 로마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고, 
이후에 또 다른 폭군 네로의 등장에도 로마는 후계자의 
인물됨과 아울러 혈통적인 관계에 집중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후 로마 시민은 카이사르가 페기한 공화정 대신 
시행된 제정을 유지시켜나가면서 율리우스-아우구스투스 혈통과 
아무 관련이 없는 갈바를 황제로 옹립시킨다.

즉 피에도 부가가치가 있음을 현실주의적인 로마 시민은 스스로 
인증이라도 하듯 더 이상 율리우스 가문의 피 - 혈통을 인정하지 
않게 한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였다는 것이 
그의 권력의 출발점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 자신의 혈통적인 약점을 
‘공포 정치’로 극복하면서 거대한 제국을 다스렸다. 

로마가 얼마나 혈통에 집착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카이사르부터 시작된 과업을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는 10배나 넘는 
치세를 통해 제국을 다스렸으며 다시 티베리우스를 거치면서 탄탄한 
제국의 융성기에 대비한 모든 정비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를 통해서 로마가 망하는 출발점은 
가장 융성하던 5현제 시대부터 그 징조가 보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외적의 침입과 같은 국가적인 재난의 시기가 아닌 경우에 
국가와 같은 거대한 조직은 하루 아침에 쉽게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면, 
물론 개인이나 소수의 방탕한 행동에 의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쉽게 붕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별히 로마 제국은 당시에 세계 전체를 의미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로마가 어떤 미성숙한 황제에 의해서 쉽게 무너질 정도로 허약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한다. 

카라칼라 
마크리누스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막시미누스 트라투스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데키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타키투스 
프로부스 
카루스 
누메리아누스 
카리누스 

상기에 열거한 인물들은 다름 아닌 211년부터 284까지 73년동안 
로마황제를 거쳐간 사람들이다. 

로마황제의 임기가 종신제란 것을 생각하면 엄청한 수치이다. 

이 시기의 황제들은 주로 군대를 배경으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군인황제시대라고도 불리운다. 

이런 황제의 숫자로만 봐서는 3세기 로마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대제국 로마의 쇠망원인에 대해서 역사가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주로 다음과 같다. 

지도자들의 질적 수준 저하, 
야만족의 침입 격화, 
기독교의 대두, 
경제력의 쇠퇴... 

이 책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원인 이전에..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3세기 로마는 로마적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으로 보고 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로마. 
그런 로마의 전통. 로마는 로마만의 색깔이 있었는데.. 
3세기 들어서면서 그 로마의 색깔은 변색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죽음의 색으로... 

그런 로마적이지 않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시오노 나나미는 카라칼라가 내세운 
"안토니누스 칙령"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책 전반적으로 이 안토니누스 칙령의 모순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안토니누스 칙령은 모든 속주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먼저 경제적인 어려움을 낳게 되고, 
로마 시민의 로마에 대한 애정이 식게 되었다. 
이런 여파가 사회, 문화, 군사적인 곳으로 퍼져 
로마의 정통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황제가 되고, 
원로원도 로마를 생각하기 전에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먼저 생각하다 보니.. 
그런 황제들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 

그런 황제들은 주위의 배신과 불만과 오해로 암살되어 간다. 
가끔씩 정통성을 가진 유능한 황제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들은 로마쇠망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전염병으로 죽거나,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벼락에 맞아 죽는 경우까지 
발생한다. 

이렇게 혼란스러워진 로마... 
당연히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아진것은 당연한 것이다. 

서북부에서는 게르만족, 고트족들이 침입하고, 

동방에서는 파르티아를 멸하고 페르시아의 부활을 꿈꾸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침입을 하게 된다. 

이런 계속된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 
옥사하는 사건까지 일어나게 된다. 

이런 혼란한 틈을 타서 로마안에 또다른 제국인 갈리아제국과 
제노비아 여왕의 팔미아제국이 생겨난다. 

대제국 로마는 삼등분된 것이다. 
이 제국들의 운명은 10년 남짓이었지만, 대제국 로마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의 쇠망의 또하나의 원인인 기독교에 대해서도 
책 뒷부분에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유대교와 달리 쉽게 약해진 영혼들의 틈속에 스며들은 기독교가 
그 이전의 많은 신들과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로마적 종교상과 
문화를 비로마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모든 것은 사라져간다. 

로마의 쇠망의 원인도 결국은 로마 안에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의 원인 또한 그것의 안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나오미는 안토니누스 칙령 발표 건 말고 로마 쇠망의 커다란 원인 중 
다른 한가지를 서로마 제국의 문관과 무관이 전혀 별따로 분리해 
서로 섞이지 않는 분리주의로 정치를 구사한 것에 그 쇠망의 원인을 
진단해 내고 있는게 흥미롭다. 

시오노 나나미가 최종본으로 집필한 15권 '제국의 멸망' 편 속에서 
지적한 그대로 고대사에서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용병술 중에서 카이사르가 잘 활용한 군 병력 문제 
측면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카라칼라 황제는 발표 하기에 이른다.

후반부 서로마 제국 말기엔 엄청난 군 병력을 감당할 재원이 부족해서 
제국 초기에 최소 20~30만명 유지하던 로마군 숫자는 불과 1~2만명 정도로 
대폭 줄어 들어 버렸고, 결국 무자비한 살육을 하며 쳐내려 오는 아시아 계 
훈족의 맹공에 견디지 못하고 제 살길을 찾아 남하하는 난민 
즉 여러 게르만 부족들의 내습을 받은 로마 제국은 막아내기를 급급한다.
 

결국 서고트 왕국과 반달족 그리고 동고트족, 훈족 등 북방 야만족들에게 
번번히 로마 마저 약탈내지는 겁탈을 당한 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오히려 야만족에게 세금을 내며 제 안전을 도모하는 
만신창이가 된 채 여러 게르만 족의 통치를 받으며 위대한 로마역사의 
모든 기반을 송두리채 잃어 버리고 결국 로마 황제마저 옹립하지 못한 채, 
5세기 말경 누구도 알지 못한 채 허무히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동로마 제국은 그 당시 대국 페르시아와 아시아 훈족과의 대치로 
서로마 제국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며, 동로마 제국에게 손해가 있을 때만 
약간 신경 쓸 정도로 전략을 세웠다 한다.

그로 부터 1,000년 이상 동로마 제국은 버티다가 결국 멸망 당했지만, 
이탈리아 본국이 포함된 서로마 제국의 허망한 멸망의 단초는 애초에 
카라칼라 황제가 내린 정책 중, 카이사르가 정립한 야만족이나 노예 출신 중 
엄격한 제한과 일정기간 복무 연한을 채운 지원병에 한해 주었던 명예로운 
'로마 시민권'을 로마에 사는 사람이라면 아무나에게 다 줘버림으로 인해 
로마 병사의 지원 체계의 격국과 원천 기반을, 스스로 송두리채 무너 뜨리면서 
로마군의 자질을 현격히 떨어뜨린 데 쇠망의 근본원인이 있다고 
이 작가는 예리하게 지적해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로마군의 명예로운 전통과 전쟁 수행으로 인한 
희생에 따른 댓가를 제대로 보상해 주며 무적 로마군의 복무로 인한 명예와 
삶의 가치 란 멋진 브랜드를 제대로 활용해 냈던 카이사르의 천재적인 
용병술과 대비해 그것을 재원 부족을 빌미로 시민권을 남발 결국  
돈으로 군대를 처리하려다 결국 그 비용에 짓눌려 제대로 감당해 내지도 못하고, 
군인으로써의 자부심마저 무너뜨려 버리고 결국 이민족인 온갖 
야만족을 활용하다가, 그 야만족에 의해 멸망 당하게 되고야 마는 
서로마 제국을 바라보면서 '이이이제' 즉 독으로 독을 제거하려는 
전략도 그 스스로 강한 가운데 써야할 방책인 것을 ..., 

독으로 독을 치유하려다 그 독에 의해 허약해진 그 자신의 
본체마저 이겨내지 못한 채 , 
그 독으로 인해 감염당해 허망히 무너져 버린 로마 멸문의 단초를 ...

로마군의 브랜드 가치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엄청난 실책을 범하게 되는 
카라칼라 황제의 용병술 실책을 통해 자부심이란 브랜드 가치의 중대성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다시한번 목도하게 된다란 점이다. 
 
 
 
 
 결언 :
 
흔히 2000년 전에 그러했듯 ' 팍스 로마나 ' 란 용어가 있습니다.
 
쉽게 해석하자면 '로마에 의한 평화' 대충 그런 의미겠지요. 요즘은 ' 팍스 아메리카나 ' 
이런 말도 떠도는 것 같습니다만은
 
상기한 바에 연관져 여기서 우린 브랜드란 대체 무엇인가? 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브랜드란 화두를 놓고 숙고해 볼 때, 
요즘 시대의 방향에 맞춰서  ' 팍스 아메리카나 '  시대에 서부 개척사를 비유해 한번 들먹여 봅시다. 
 
당시 미 서부땅에 펼쳐진, 광활한 대지의 목장주들은 자신이 키우는 마소를 다른 목장주들의 
마소와 어떻게 하면 방목을 해키워도, 자신의 소유 임을 단박에 인지 해 낼 수 있느냐? 란 
난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바로 자신의 싱징적인 마크를 새겨, 마소의 등짝에 뜨거운 낙철로 지저버리는 
낙인을 개발해 내게 됩니다. 
 
그 낙인을 두고 우린 " 브랜드의 시효  " 라 명명하게 됩니다. 
 
불로 달구는 낙철이란 즉슨 현대의 광고매체를 이용한 광고 내지는 홍보 행위라 비유했을 때, 
자신의 마크를 소비자의 잠재의식과 뇌리에 깊게 인지시키려면 ? 
 
마소의 살점에 그냥 뜨거운 낙철을 댄다고 올곧게 새겨지는 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역권 내 또는 자신의 광고 브랜딩 화를 소비자의 뇌리에 충분히 각인시키려면, 불로 달군 낙철
(광고)로 꾸준하게 압력(지속력)을 가해 눌러 줘야, 소비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하나 둘씩 
그 브랜딩한 제품을 인지해 내는, 가치있는 제품으로, 뇌리에 각인되어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도록 
만드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브랜딩 전략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것이라 사료됩니다. 
 
브랜드가 올라가고 고귀해지면, 일단 부가가치가 올라 갑니다.
 
똑같은 제품이라도 세계적으로 브랜딩 화가 완료된 '프라다, 구찌, 페라가모' 같은 이태리 제 
가죽제품은 얼마나 높은 가격과 희소가치로 소비자들에게 어필되고 판매되고 있는 것입니까?
 
국운이 쇠한 사회란 한 때 브랜딩화을 완벽히 구가하였던 위대한 로마제국 일지라도 상기에 
지적한 것처럼 몇몇 사회 불안요인로 인해, 통화가치 기축의 혼조와 인플레이션 및 스테그플레이션
이 만연한 병든 사회로 몰락되어 감을 의미하는 것이며,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을 제 위기에 대한 
극복을 통해, 오히려 국운을 강화시켜 왔던 것에 반해, 3세기 후반기를 넘어서면서 부터는, 
너무 잦은 정국불안정으로 인해 서서히 지쳐가며, 위기로 뜷린 구멍을 위기로 메우기 바쁜 ...
 
결국 그것이 로마제국을 패망으로 이끌었다는 시오노 나나미 씨의 통찰적 역사 서술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 크다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작금의 일본제국은 고공의 선진국화 발전을 이미 거쳐 정체의 늪 속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고, 국가 발전의 방향키를 잃고,  정체기로 들어선 가운데, 그 선진화의 길을 
차근히 따라가고 있을 현재 우리의 자화상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올바른 역사적 좌표와 
지향점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앞으로 전진하도록 교시해 주는 바, 
 
우리는 니혼의 한 여성 역사 저술가의 역사적 통찰서를 통해 필시 우리에게 ' 팍스 코리아나' 롤 
유구히 구사키 위한 지혜의 길라잡이로, 또한 국체의 올바른 역사 진행 지침서로써 
이 로마인 이야기 대작을 지혜의 손금으로 가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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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사이트 : 

. 로마황제 연대표  
                로마황제 연대표

. 카라칼라 황제가 212년에 발효시킨 안토니누스 칙령
                안토니누스 칙령

.  카이사르가 꿈꿨던 로마법
                카이사르가 꿈꿨던 로마법

. 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로마제국의 통치기술인 '빵과 서커스'의 유래
                로마제국의 통치기술인 '빵과 서커스'의 유래

. 고대 로마 지도자의 성적표
                고대 로마 지도자의 성적표

. 술라
                술라  

. BBC 방송 6편 - 로마제국의 탄생과 몰락
                BBC, 로마제국의 탄생과 몰락

. 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1/3
                율리우스 카이사르 2/3
                율리우스 카이사르 3/3

. 야만인이 로마를 죽였다
                야만인이 로마를 죽였다.

. 안전 사라진 해적의 무대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시오노 나나미)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영웅들이 로마를 망쳤다
                영웅들이 로마를 망쳤다

. 또 하나의 로마이야기
               또 하나의 로마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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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기사 :
치열한 생존경쟁 싸움으로 죽다 살아난 한국 반도체 산업
2009년 상반기까지 ' 치킨게임 ' 이라 불리던 (한국일보) ...
  치킨게임 이란? ☞ 치킨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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