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건반을 넘어간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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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반 을 넘 어 간 도 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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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에게 보내는 엽서 ==================== 헤르만 헤세
오늘따라 차거운 바람이 불어
창 틈새에서 흐느낍니다
조금 전까지 달콤한 꿈이 있던
초원에 서리가 하얗게 내렸습니다
창문에 마른 잎 하나가 스쳐갑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안개가 덮힌 먼 도시를 거니는
당신의 모습을 봅니다, 나의 연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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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깊은 어둠에 싸였던 이 곳에도 밝은 동녁이 ...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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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9. 5일 일기 >
날씨: 청명 /기분지수: +,- 100, 0 점 /수입: - /지출: 110,000
/빚: -
전혀 서로에 대해 모르는 남녀가 만나자 마자
진한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건 자기 기만이다
왜냐하면 나는 민정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허나 그녀의 두툼한 입술, 불같이 뜨거운 허벅지
아! 지금 너무 혼란스럽다
이런 날도 다 있다니...
장난감 건반 모서리에 부딪친 이맛살이
아직도 마치 환상의 혹처럼 부풀어 있다
현자 그 백여시 같은 계집
현자가 불러 냈을 때 달려나간 내가
바보야 바보! ...
내가 타락한 걸까?
그렇게도 고독했던 걸까 ...
오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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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정씨 여기서 우리 몸 좀 녹히다가 가죠?
가을 날씨도 이젠 제법 쌀쌀하네요 어때요? 따끈한 커피 한잔? ]
- [ ... ]
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거린다
약간 주근깨가 낀 볼에 깊은 보조개가 패이고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커다란 두 눈엔 백치미마저 엿보이는 민정을
삼식은 신비롭게 치어다 본다
대학로에 자리한 수많은 카페의 외양이 보헤미안제 화장품으로 화장하듯
고상한 녹청색으로 루즈를 바른 <마리> 란 이름의 카페문을 열어 제끼며
삼식은 현자의 친구인 민정의 손목을 잡아 당긴다
카페 안은 대학생들인 듯한 여러 젊은 연인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는 게 눈에 띤다 삼식은 민정보다 앞서거니 하며 제일 안쪽
칸막이가 높다란 핑크빛 고급 소파로 마치 자기 방 침대로 몸을 던지듯
털썩 체중을 날린다
둘은 마치 오랜 연인처럼 나란히 앉아, 삼식은 메뉴판를 대충 흩어 보더니
상대 의사도 묻지 않고 비엔나 커피 두 잔을 주문시킨다
그리고 삼식은 오늘 처음 만난 민정의 침묵에 잠긴 두텁고 붉은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다 본다
- [ 어머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 보세요? ]
- [ 민정씨는 평소에도 그리 말씀이 없으십니까? ]
취기어린 흐릿한 눈동자로 민정의 옆 자리에 앉은 삼식은 약간 피로한 듯
고개를 소파에 기대있는 민정을 바라보다 갑자기 붉은 그녀의 입술을 도발한다
약간의 저항은 있었지만 잠시 후 민정이는 삼식의 돌연한 기습에 두 눈을 감는다
삼식은 자신에게 명백한 거부의사를 보이지 않는 민정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더 격한 키스를 퍼붓는다
흥분과 얼큰한 취기로 달아오른 삼식이는 키스를 하며 그녀의 치마 속으로
굵고 거친 손을 집어 넣는다 동시에 격렬한 반항을 하는 민정 그러나 카페의
아늑한 분위기와 시선을 의식했는지 잠시 후 아무런 반항도 없다
이제 두 남녀는 서로 포옹과 키스신을 통해 굶주린 욕망을 떨쳐 버리려는 듯
아무런 거리낌없이 서로가 서로의 육체적 감각과 체온을 나누며
격한 애무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짙은 어둠이 벌써 거리를 뒤덮은 지 언제인지도 모를만큼 시간도 잊은채로
스킨 쉽에 몰두해 있던 호색한 삼식이와 백치미가 일품인 민정!
그렇게라도 해서 낯설은 서로에 대한 이질감을 털어 내려는듯 한 지
어언 두 시간
- [ 이젠 현자한테 가봐야 할 시간인데...민정씨! 어떻게 할까...요? ]
이제 삼식은 아예 고개를 뒤로 제낀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민정에게
반존대식 반말을 한다
현자를 통해 서로 인사 한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서로 친숙해지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묘한 관능미가 그녀에겐 있는 듯 하다
삼식은 민정이의 시원한 큰 두 눈을 치어다 보며 반응을 기다린다
그녀는 꿈속을 거닐듯 나직하고 느릿한 톤으로 말을 이어 간다
- [ 그럼 우리...가요 그런데 언제부터 반말 비슷한 걸 하세요?
제가 언제 반말을 하시라고 허락했던가요? ]
둘은 다 식은 커피값을 지불하고는 아까부터 무슨 외계인처럼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흘낏흘낏 쳐다보고,서로 꾹꾹대고 웃어대던 옆자리 학생들이
쏘는 뒷눈총을 받으며 현자가 경영하는 종로 5가의 무지개 스탠드 코너를
향해 대학로를 되돌아 간다
청색 투피스에 긴 생머리를 기른 그녀의 체취에선 묘한 관능미가 풍긴다
반치기 어린 애교스런 표정을 지으며 민정은 유난히 째진 삼식의 사팔눈을
내려다 보자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괴면쩍어 헤죽 웃는다
민정도 새죽 따라 웃는다
하이힐을 신어 그런지 몰라도 반뼘 정도나 더 큰 키의 민정은
어쩐지 좀 위태로운 자세로 두른 삼식이의 팔짱을 힘겹게 받으며
완연히 깊어가는 마로니에의 낙엽더미를 헤쳐 걷는다
- [ 헌데 삼식씨는 현자를 어떻게 아세요? 아까 보니 꽤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같던데... 혹시 옛애인이라도 돼시나요?
제 고향은 순천이예요
현자하고는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 고향도 비슷하고 해서 서로 친하게 되었죠
그런데 삼식씨는 현자완 꽤 오랜 친구였는가 보죠? ]
- [ 한 사 오년? 현자완 친구로 지냈죠 현자에겐 오철이란 사람이 있었어
그들의 싸늘히 식은 사랑의 증인이라고나 할까?
그래 별로 유쾌한 추억이 아니라 민정씨에게까진 자세히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
- [ 어머 그래요? 현자에게 그런 로맨스가 다 있었쎄요?
그런데 왜 내겐 아무런 말도 않았을까...요? ]
- [ 글쎄..., 깡순이 현잔 원래 묻는 말 외엔 별 말 안하쟎어?...요 성격이... ]
- [ 차라리 말 놓아요 저한테요 그리고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 ]
넓직한 플라타너스 잎새들이 쌀쌀히 부는 가을 바람탓인지
마로니에 밤거리의 가스등 불빛 아래로 삼삼오오 모여들어 지난 여름날
겪었던 온갖 연인들의 속삭임들을 수다떨고 있는 듯 하다
종로 5가 역 옆골목을 꺽어 삼식은 민정과 팔짱을 끼고는
수많은 여관문을 스쳐 지나며 문득 민정의 손목을 끌어 당기고 싶은
불같은 욕망이 일었으나 어떤 자석의 힘에 이끌리듯 현자가 일하는 스텐드
지하로 빨려 들어간다
- [ 현자야 끝나려면 아직 멀었냐?
우리 같이 나가서 소주나 한 잔 때리자 ]
- [ 야 삼식아 너 어딜 갔다 이제야 나타난거야 엉?! ]
- [ 뭐오... ]
현자는 두 눈에 쌍 도깨비 불을 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민정은 현자의 그런 쌀쌀한 말투를 보더니 스탠드 안 좌석에 놔둔 핸드빽을
놔둔채 황망히 밖으로 뛰쳐 나간다 마치 무슨 죄를 진 사람처럼...
현자는 취기어린 몽롱한 눈빛으로 술잔을 들어 자기의 분노를 곱씹으려는듯
연거푸 마셔댄다.마치 사랑의 채권자처럼...
현자와 삼식 < 그들 둘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닌 건
서로가 다 뻔히 아는 사실 아닌가!? > 라고 삼식은 자문해 보며
그녀의 새침한 반응에 의아해 한다
잠시 후 조금 어눌하고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삼식이는 따져 묻는다
- [ 현자야 너 왜그래? 너 많이 취했구나
야, 임마 니가 니 친구하고 잠깐 나가 바람 좀 쒸우고 오라 안했어?
아! 이 친구는 또 어디 간거야? 제기럴... ]
- [ 야, 너 지금이 몇 시간째야 엉? 내가 내 친구 데리고 나가 잠깐
밥이나 먹고 오라 그랬지 그래 몇시간 동안 연락도 없이 나가 놀다오라 그랬어?
이 치사한 자식아 ]
- [ 너 많이 취했냐? 대체 왜그러냐? 아까 네 코너에 손님들 많이 있었쟎아
그래 다방에서 너 끝날 때까지 기다린거야 애들처럼 왜그러냐!
너 지금 이 삼식이 자식이라 그랬냐? 왜 그래 엉?! 날 경멸하냐?
그리구 정 못믿겠거덩 종오 다방 마담한테 함 전화해봐라 ]
삼식은 마치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처럼 오히려 큰소리를 쳐 대고
길길이 변명을 늘어 놓는다 물론 이 야심한 시각 종오 다방문이 내린 걸
다 알고 설사 다음날 이런 시덥지 않는 일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마담에게
되물어 볼수는 없다는 사실을 다 알고 엉큼 떠는 수작이렷다
현자를 보면 언제나 묘한 동정심이 생기는 그 어떤 사랑도 아니고 미움도 아닌
애처로운 이 감정이 삼식은 왜 생기는 지 몰랐다
그리고 또 친구이자 현자의 옛애인인 오철이도 떠오른다
현자의 거친 반응을 보고 삼식은 다시 민정을 데리고 여길 찾아 온 걸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러면서도 당연히 그랬어야 했었다는 이 쾡한 기분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런지...
- [ 아뭏튼 너 이제 다신 여기 오지마 알았어?
오늘 부로 넌 끝이야! 내가 모를줄 알어? 난 다 알어! 다 느낄수 있다구
이 지저분한 인간들아! ]
삼식은 약이 올랐다 그 강렬한 욕정을 뿌리치고 민정이와 다시 온 것은
현자와의 우정어린 비중을 더 고려했기 때문이었는데 현자는 술에 취해
지금 평소와 다른 거친 막말을 쏘아대는 것이다
삼식은 현자의 지난 날을 회상해 봤다
< 오철이 자식 사람 하나 버려 놨구만! >
이 년만이었다 현자를 본 것은 우연히 길을 걷다 마주친 현자는
몰라 보게 야한 머리와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한 채 거리를 걷는 현자가 만일
삼식이를 아는 체 안 했더라면 아마 그녀를 몰라볼 정도로 많은 변화가
그녀에겐 있었다
현자는 더이상 여수란 소도시에 있는 정형외과의 순진한 보조 간호원도 아니었고
친구 오철이의 발길에 차인 뒤 기약없이 여수를 떠나갔다 이 년만에
서울에서 우연히 현자를 만난지 어느덧 일 년이나 더 흐른 것이다
오늘 자기 친구 한 명 소개해 준다길래 저녁 7시에 현자네 술집에서
인사를 나누다 손님도 밀려오고 해서 삼식과 민정은 저녁밥이나 먹고 오라는
현자의 등쌀에 떠밀려 대학로로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날도 다있다
민정과 삼식은 처음 만나 걸을 때부터 오랜 친구처럼 팔짱을 꼈고,
어둡고 조용한 길목과 벤취를 골라 찾아 다니다,
결국 카페 <마리>로 가선 서로 격한 애무를 나누게 됐으니 말이다
< 그러나 삼식이가 표현한대로 과연 이상한 날이라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일상적인 날이라고 표현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상대가 타인으로 어떻게 살아 왔는지에 대한 검증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호감가는 이성이라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통과의례도 없이,아니 그것보다 서로의 감정에 대한 시간적 검증도
없이,경박하기조차한 찰나의 탐익과 스킨쉽 행위에 몰두할 수 있다는 사실
두 사람의 이런 스피디한 애정행위에서 민정 역시 면죄받을 길은 없겠지만 말이다
좌우간 일단은 삼식이의 공격적이고 충동적인 이성에 대한 도전성을 고려한다면
이 날은 전혀 이상한 날이라 말할 수도 없을 듯 했다
삼식이가 살아가는 방식,
속물적 태도 즉 다시 말해 그의 엉큼한 성격과 저속한 해프닝를 아는 사람은
절대 이날은 이상한 날이라 말할 수 없으리라 >
- [ 현자야, 네가 정 그런다면 다신 여길 안 찾으마 잘 있어라 ]
- [ 그래 다시 나타나지도 마!
이젠 니꼴 보기도 싫어 술값은 됐으니까 그냥 꺼져 가 다들 가!
가버리라구... ]
마치 억울한 사람이 죄를 흠뻑 뒤짚어 쓴 죽을 상을 해가지고 밖으로 뛰쳐나간
삼식은 문 앞에서 서성대는 민정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 [ 어라? 민정씨 아직 안갔어요? ]
- [ ...현자완 이웃 사는데 어떻게 혼자가요
그냥 지랄하는 꼴값 보기사나워 집으로 그냥 가려다 되돌아 오는 길이었쎄요
제 빽두 거기 있는데...]
그리곤 아무 말도 없이 손톱만 깨물어 뜯는 민정을 보고는
삼식은 담배를 한 대 쭉 빼문다
가슴 속에서 치솟는 이 껄껄하고 난망한 기분을 삼식은 토해 버리기나 하듯
후-후 거리다 이윽고 삼식은 표정을 풀고 말을 건냈다
- [ 민정씨 오늘 현자가 상당히 오해를 한 모양이오
이거 내 텔 넘버니까 꼭 연락해줘요! 알았죠?
그리고 현자 많이 취했으니까 잘 좀 집에 데리고 가고... ]
- [ 삼식씨 그냥 가시려구요? 저 혼자 어떡해요?
많이 취했으면 같이 집으로 데려가야죠 ]
- [ 아니, 나보고 여기 나타나지도 말래!
현자는 옛날하곤 많이 변한 것 같아 옛날에 안하던 쌍말까지 다 하고
오늘은 내가 그냥 사라지는 게 나을 것 같아
제기럴 욕도 다 얻어먹고 휴우 그건 그렇고 오늘 참 즐거웠어요
민정씨는 앞으로 내게 아주 각별한 사람이요! 다음에 또 봐요 ]
- [ 그래요 그럼 잘 가요 전 현자와 같이 집에 들어 갈께요
그럼 다음에 또 뵈요 전화 드릴께요 안녕-- ]
삼식은 자제 초등학교 담벼락을 돌아서다 길 옆 전봇대에 서서
오줌발을 나리며 밤하늘에 총총한 별을 치어다 본다
<아! 벌써 삼 년이나 흘러 버렸군 그래> 이란 독백과 함께 가을바람에 구르는
낙엽처럼 무상히 흘러가 버린 지난 여수에서의 옛일들을 문득 회상해 본다
2.
여수의 중앙시장통
새벽의 비릿한 바닷냄새와 정막한 파도소리는 그 날도 여지없이 철썩거렸다
멀리 보이는 돌산대교도 이젠 제법 이 지방 명사가 충분히 된 듯
김서린 뿌연 안개로 제 몸을 카리스마하게 한껏 숨기고 있다
시내 중앙동 언덕을 오르면 옛날 임진왜란 때 이 충무공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고
삼식은 휴일날 한가하면 그 곳을 찾아가 옛날 임란 때를 회상해 보며
한 편의 시도 끄적거리기도 하는 현실 감각이 좀 모자란 그럼에도 약간의 낭만어린
구석이 있는 한량한 몽상가이기도 했다
여천 공단이 생겨난 뒤 인근 여수시에는 많은 발전이 있었고
또 개발과 아울러 많은 공해도 심화 되었다
얼마 전에는 여천공단의 어느 화학 공장에서 유독 가스 탱크가 고장나
하마트면 여천군 전체 주민 소개령을 내릴 뻔한 일도 있었으나
다행히 진압이 잘됐던 일도 있다 한다
멀리 삼천포가 내다 보이는 여천만의 해남 조선소에 대형선박 건조 공사
인부를 대거 모집한다는 시장 통 주막 할머니의 귀뜸을 듣고
마냥 할 일 없이 빈둥거리던 삼식과 오철은 나란히
배관 보조공으로 취업을 해 일을 다니게 되었다
물론 일 마친 뒤 저녁에 오철과 삼식은 여러 유흥업소를 돌아 다니며
오철이의 탁월한 노래 실력 덕분에 공짜술을 여기저기서 대접받으며 지냈다
하여간 오철이가 '아파트'란 노래만 불렀다 하면 그날은
꼭 무슨 사건이 일어 나는 것이다
현자와 친하게 지내게 된 사건이 있던 날 밤도 삼식과 오철이는 업소에서
공짜로 얻어먹은 접대주 덕택에 둘 다 고주망태가 되어
집으로 귀가했던 것이다
- [ 이런 지-이미럴 이 영감탱구리가 안으로 또 문을 잠궈 부렀네... ]
- [ ... ]
- [ 야 임마 살살 넘어가 새꺄 노친네 잠 깨면 우린 둘 다 죽는거야 임마 ]
- [ 알았어 새꺄 ]
쿵! 오철이는 취기를 이기지 못해 바둥거리다 결국 낡아빠진 철대문 꼭대기
쇠꼬챙이에 바지가 쭈욱 찢어지면서 안 마당 공구리 바닥으로
그대오로 추락하였다
- [ 아이고오 머리야! 으윽... ]
- [ 야 이 새끼야----아! ]
삼식이는 두 눈이 휘둥구래 치켜 뜨고는 대청마루에서 다듬이 방망이를 들고
나오는 할아범을 보고는 외마디 비명소리를 냅다 질러 댔다
새벽에 오철이와 삼식이는 주인 할배의 매서운 군밤을 맞고도 모자라
나란히 꿇어 앉아서 두 손을 쳐들고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 [ 두 손 똑바로 못들어? 야 이 화상 놈덜아
내가 새벽엔 대문 넘어 들어오지 말라고 했냐 않했냐?
그런디 이제는 열쇠도 안따구선 몰래 철대문을 넘어 들어와?
쯧쯧_쯔 네 놈들 도대체 언제 철 들 참여?
이사 가래도 가지도 않고 도대체 방센 안낼참여? ]
오철과 삼식은 주인 할아범의 짱짱한 일장 훈시를 듣고서야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옆방사는 현자는 창문을 빼꼼 열고는 혓바닥을 낼름 내밀고
다시 창문을 탁_콩하며 닫는다
오철이는 약간 까진 이마를 자꾸 손으로 문지르며 쫑알거렸다
- [ 현자 저 계집애가 우릴 비웃으며 놀려?
야 삼식아 너 가서 이 바지 좀 현자 창문에 던져 놓고 와라 지미럴
내 바지가 다 찢어져 버렸쟎어 이거? ]
그 후로 현자와 삼식 그리고 오철이는 삼총사가 되어 서로 친밀한 이웃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철이는 갑자기 취미로 하던 음악 활동에
전념을 하기 위해서 같이 다니던 배관 보조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
- [ 현자야 우리 셋이 나가서 따로 살자 ]
토요일 늦은 저녁 황혼녁이 출렁거리며 넘실대는 오동도 앞바다로
나란히 놀러나간 오철이와 삼식이 그리고 현자는 탁구장에서 탁구를 치고
남해가 내려다 보이는 조그만 찻집에 마주앉아 있다 오철이가 불쑥 꺼낸
제의에 시선을 주목하였다
물론 삼식이는 이런 말을 현자에게 하리란 걸 미리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 [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나가서 살자니? 너희들 둘하고 나 혼자 살어?
미쳤니 너? ]
- [ 하하 그게 아니고 독신인 으리 삼촌이 멀리 떠나거든...
항상 삼촌은 배타고 멀리 나다니시잖니 현자 너도 그 때 봤지 아마? ]
서글서글한 큰 키에 푸르스름한 짙은 수염이 난 갸름한 얼굴형인 오철이는
진지한 표정을 담아 초롱거리는 현자의 해맑은 눈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 [ 우리 삼촌이 연안 고깃배를 그만두고 외항선원이 되셨는데
나보고 글쎄 삼촌집과 가게에 들어와 살라고 하시쟎니
그래 방도 두개고 조그만 가게도 있고 해서 현자 너한테 의견을 물어보는거야
너 마냥 보조 간호원 노릇만 할래? 내가 사장 시켜줄께 ]
한 동안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던 현자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 너희들도 알다싶이 나는 홀홀 단신 고아 출신이고 경험도 없지만
진실한 친구제의라 믿고 그래! 내가 한번 가게 맡아 해볼게
그런데 너 설마 가게 센 안 받을꺼지? ]
현자는 자신에 찬 말로 답했고 그 눈망울엔 오철이에 대한 애정어린 눈길로
그득했다 이삿짐을 옮긴 그들 셋은 같은 한 집에서 살게 되었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오철이와 현자는 심야에 가끔 바다로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오철이는 현자와 옆 방에서 동거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들은 살림을 차린 것이다
삼식이는 혼자 자는 멍한 분위기가 싫어 집에 안 들어 가거나
일하는 동료들과 술이나 화투를 치며 시간 때우다 아주 늦게서야 귀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현자는 간단한 짐만 싸들고 온다간다 말도 없이
옛날 다니던 병원으로 돌아가 버렸고 전화를 하거나 만나려 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오철이를 회피하는 것이었다
옛날 화사하고 명랑한 성격에 늘상 미소를 띄우던 현자의 갑작스런 변화에
삼식은 오철과의 사랑이 잘못되어 감을 느꼈고 삼식이는 그 사이에 끼여
항상 중간적 입장을 취하기 바빴다 사실 전자 오르간을 연주하는 오철이는
잘 생긴 외모와 자상한 매너 덕에 항상 아가씨들이 주위에 들끓었었는데
그런 요인에서 서로의 갈등이 있을 때도 많았지만 그것보다 언젠가 오철이는
오동도 방파제에서 아이를 낳겠다는 현자에게
< 너를 책임질수 없으니 낙태하고 그만 헤어지자 >라고 말했다며
술이 고주망태가 된 채 삼식에게 고백하였다
그 다음 날 현자가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바로 그들의 뜨거운 사랑을 질투의 여신에게 정통으로 뒷통수를 얻어 맞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삼식에게 만나자는 현자의 전갈이 왔다
- [ 삼식아 나 여기 여수를 떠날란다 며칠 전 애를 지웠어, 흑흑흑
이렇게 떠나는 쓰라린 내 심정을 아는건 너 밖에 없어
난 오철이를 끝끝내 저주할거야 잘있어 삼식아 너는 영원한 친구야 ]
현자는 쓰라린 추억을 가슴에 간직 한채 여수를 떠나 서울로 올라갔고
오철은 얼마 있다 삼촌가게를 세주고 부산의 한 나이트 크럽 밴드 마스터로
취직되어 떠나갔다 얼마후 삼식이도 서울에 취직되어 여수를 떠난 지
어언 삼 년이 흐른 것이다
물론 오철이에겐 작년 겨울에 만나 현자와의 재회를 이야기해 줬으나
이미 싸늘히 식은 두 사람의 관계였다
현자는 영원히 오철이를 미워한다는 이야기를 현자가 경영하는 스텐드 코너로
이따끔 찾아갔을 때마다 술만 취했다하면 고장난 옛날 전축판 처럼
반복하며 욕하고 또 저주하였다
3.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의정부 행 버스를 타기 위해
천천히 마로니에 언덕길을 거닐며 잠시 지난 날을 회상한 삼식이는
왜 현자가 매몰찬 증오의 폭언을 내게 쏟아 부었는지를 생각하다가도 어쩌면
아까 민정이가 나를 문 앞에서 기다렸을 지도 몰랐을거란 철딱서니 없는
생각도 동시에 느끼면서 삼식은 오로지 현자 생각에 너무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바래 민정이를 내게 소개하려 했단 말인가?
민정이는 분명히 간호원 일을 한다고 했는데 현자는 어쩌면 옛날 오철이가
가슴속 깊이 사무쳐 그런 민감한 반응을 했을 거란 결론도 해봤다
그녀가 여수를 마지막 떠나기 얼마전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가슴아린 고뇌와
증오로 얼룩져 풀죽은 모습이 삼식은 자꾸만 클로즈 업 되는 것이다
왜 그 둘은 서로가 증오에 찬 쓴 아픔만을 남긴 채 서로 이별을 해야 했었을까
차후에 안 일이었지만 오철이가 업소에서 음악연주를 하면서 현자와 살고 있을 때
음악친구였다는 달수가 찾아 왔었다 했다 그 날 오철이는 일에 쫓겨
식사나 하라며 현자와 달수를 보냈었는데 몇시간이나 뒤늦게서야 온 걸 트집 잡고
오철이가 마구 화를 내었다는 푸념을 나중에야 듣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일이 있은 뒤로 현자가 왜 그리 얄밉고 또 자꾸 의심가는지
무슨 전화가 와도, 어디에를 나간다 해도 자꾸만 이상한 의심만 들고
나중에 애를 가졌다는 현자의 고백에도 그것이 정말 자신의 아이인가란
의심까지 하면서 결국엔 인간의 탈을 쓰고 결코 하지 못 할 말을 다하여
현자의 행복을 산채로 유기했다는 오철이의 쓰라린 고백을 떠올리며
도대체 사랑은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실된 것인지 사랑과 미움은 화투의
앞이마와 뒷통수 같은 속성을 지녔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떠올려 본다
서로 인생 길이 엇갈리고 더구나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각인시키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이 의처증 내지는 의부증이라는 오해의 병이란 것은
도대체 어떤 연유로 움트는 것일까?
사람이 살다 보면, 누구나 서글픈 불행은 존재하는 것이지만도,
결코 만나선 아니 될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나 살고,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이란 생각을
삼식은 문득 해본다
아마 현자와 오철이는 처음부터 만나선 안 될 악연이었으리라 ...
하지만 나와 현자의 오늘 일은 분명히 오철과 현자의 관계와는 그 성격의
다를 것인데 어째서 현자가 그런 과민 반응을 보였을까?
그것은 아마 지난 날 오철과의 억울한 오해로 인한 회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게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해 보며 발길을 천천히 옮겨 본다
삼식은 마로니에 벤취에 앉아 감았던 두 눈을 짜르릉거리며
밤 하늘을 치어다 본다 세 개피밖에 담배를 한 개피를 빼물고 호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져보니 지폐가 하나도 없다 아까 현자가 난리 부루스를 칠 때
10만원짜리 수표를 탁자에 던지듯 두고 나온 걸 뒤늦게 깨달은 삼식은
마음이 혼란해져 온다
자정을 넘긴 마로니에 공원 벤취에 거지 음악가 한 사람이 손풍금을
가만히 쥐고 아마 전철안에서 구걸행위시 연주할 때 나오는 레퍼토리를
자꾸 연습하려는 듯 똑 같은 찬송가를 계속 작은 소리로 반복 연주하고 있다
< 아! 아까 그냥 나올 것을... 직장도 얼마 전 짤렸는데 방세는 달라 그러구
이거 정말 미치겠구먼 아까 뭐하러 돈을 내던지구 나왔누 에이... >
잠시 후 삼식은 무작정 심야버스에 올라 타 기사 양반에게
공손히 고개를 조아린다
- [ 기사 아저씨 이거 참 죄송함다 지갑을 잃어버려서요 ]
의정부 터미널 옆 자락에 자그만 달셋방에 세들어 사는 삼식은 낡고 헐은
나무대문을 흔들어 본다 안으로 잠근 나무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삼식은 드디어 대문을 타고 넘어가다 대청마루에 요강을 들고 나오는
주인 할망탕구와 정면으로 두 눈이 마주 친다
- [ 네 요_ 노옴 너 잘 걸렸다 또 월담이냐 게 섰거라... ]
쿵---삐이리-릴리 문 안에 버려진 할머니의 손자 장난감 건반 위로 떨어져
마빡을 부딪치며 옛추억들이 번갯불처럼 튕겨오는 걸 느끼면서 심드렁한
마당 구석구석에로 여울지는 멜로디 가락을 삼식이는 절절히 아주 통절히
느껴야만 했다
4.
그후 민정과 삼식은 가끔 만나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그 해 겨울을 지냈건만
그 둘은 만나 애정을 쌓아가면서도 되도록이면 현자의 애기를 삼가했다
그러나 현자에게 두 사람 다 어떤 특별한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민정의 얘기로는 어떤 사람과 열애 중이라 그랬다
차디찬 구들방 속에서 무료히 뒹굴던 사월 어느 날 민정에게서
뜻 밖의 전화가 왔다
< 잠시 시내 어느 경양식 집으로 나오라는... >
의정부 중앙 시장엘 가보면 여타 중소도시가 그러하듯 항상 활기가 넘쳐 흐른다
삼식은 번화가에 밀집된 여러 간판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2층 경양식 집
'만찬' 이라는 간판을 보고 안으로 들어 선다
- [ 여기야 삼식씨! ]
오늘은 화사한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민정이가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 옆에 뜻밖에 해맑은 미소의 현자가 앉아 있다
- [그 동안 잘 지냈어? 어라! 현자 너 정말 오랫만이다 인자 화 좀 풀렸냐?]
- [ 나 스탠드 바 고만 뒀어 삼식아 그래 시간도 널널해 놀러 왔는데
니가 오늘 우리 공주님들 모시고 영화 구경 좀 시켜 주라! ]
맑은 개나리 색 노란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현자는 괴면쩍게 웃으며
말을 되받는다 참 밝은 옷을 입어 한 옛날 그녀의 명랑한 모습을 떠올리던
삼식은 씨익 웃으며 탁자에 놓인 돈까스에다 케첩 소스를 두르며
탁구공 되받아 치듯 째빠르게 말을 되받는다
- [그래 그럼 내가 시켜 줄 터이니 느그들이 돈 좀 내그라
나 요즘 무지 어려우니라 ]
-[ 호호호 이 엉터리... 돌쨍이 얌체 꼬멩아 ]
< 아! 얼마 만에 들어보는 화사한 현자의 웃음소리냐? >
삼식은 속으로 화들짝 놀라며 현자에게서 어떤 큰 변화가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삼식은 민정과 현자를 보내고 나서 잠자리에 누워 천천히 일기를 써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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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04. 05일 일기 >
날씨: 해 맑음 /기분지수: 95 점 /수입: 없었음 /지출: 없었음
/빚: 있었음
민정이의 얼굴만 보면 자동으로 얼굴이 떠오르는 깡순이 현자가 찾아 왔었음
현자는 다음 달에 시집을 간다 한다
신랑은 성실하고 건실한 직장인이라고 했고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난
어느 권사님의 권고로 지난 날의 상처를 신앙으로 극복하고
열심히 교회를 다니다 우연히 목사님 소개를 받아 얼마전 맞선을 보았는데
인물이나 배경을 본 게 아니라 그 남자의 수수한 성품에 이끌려
결국 결혼하기로 했다 한다 그래 그런지 나는 오늘 어두운 과거를 가진
현자라는 친구에게서 오랫 만에 해맑은 부활의 웃음을 봤다
그녀는 다시 명랑해 질 것이고 반드시 그리 돼야한다
그녀의 사랑과 실연으로 인해 물들던 회색빛 과거는
이제 동녘 해가 서서히 밀려오듯 밀려 날 것이다...
오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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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삼식이는 친구 오철에게 이 소식을 편지로 써야겠다란 생각을 했다
< 자식! 그 녀석 어떤 느낌이 들까? > 현자의 결혼을,
그녀의 영원한 행복을 빌어 주자고 말이시 ...
그녀가 순박한 처녀였을 때 여수에서의 시절은 짙은 흑암이었고
이제 새롭고 희망찬 삶을 꾸려나갈 현자의 새낭군
그리고 그 빛과 그림자 경계선 상의 휴전선 보초병과도 같았던 삼식은
새로운 변화의 조짐으로 그녀의 의정부 방문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녀가 까닭없이 받아야 했었던 지난 사랑의 시련들이 말끔히 소멸되길
기원 하면서 말이시 ...
발목이 분지러진 스탠드를 꼭바로 고정시키고 일기장을 덮으며
창가에 패인 별님과 달님의 정기어린 웃음을 지켜 보다
어느새 이른 아침 풀잎 위로 떼구루루 구르는 저 영롱한 이슬방울 처럼 말이시 ...
이제 그 옛날 친구 오철이와 삼식이가 대문에 걸려 와다당탕 추락해
머리통이 박살나듯 말이시
흠_흠 이란 몽상어린 잠꼬대를 흥얼이며 삼식은 미꾸라지같이 미끌대는
아지랑이 춘정에 서서히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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