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일 일요일

윤정희 출연작 영화 - 시( 詩 , poet ) -5/13일 개봉 !

 

 

 

2010년 5월 13일 개봉 !

 

 

영화 속에서 미자가 듣던 시 강좌 내용 중 ‘시(詩)를 쓰는 것’에 대해

강사로 등장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보는 것과 흰 종이의 여백, 그리고 연필을 깎는 것이라고. 그렇다.

시는 자신이 보며 느낀 것을 연필로 한줄한줄 써 내려가며,

흰 종이의 여백을 채워감으로써 완성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검은 필름이 흰 종이라면, 배우는 시어가 되고, 조명, 음악 등의 요소요소들은

 모두 연필이 된다.

그렇게 감독은 스스로 시인이 되어 필름 속에 다양한 연필로써

자신의 느낌과 생각들을 한 장면씩 새겨간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詩]는 바로 감독 자신과 관객들이 함께

완성해가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영화다.

 

길고 자세한 설명보다는 단 한 줄의 은유로써 표현하고, 강한 자극보다는

뜨겁고 깊은 여운을 주는 문학 장르인 시(詩),

이창동 감독은 바로 그런 시를 이번 영화 속에 한줄한줄 써 내려가고 있다. 

 

 

미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녀의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과 삶!!

전작들과는 달라진 이창동 감독의

더욱 깊고 너그러워진 시선, ‘미자’!!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그의 다섯 번째 작품.

 

매 작품마다 깊은 통찰력과 인간적인 시선으로써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이창동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사람

그리고 삶을 비춘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깊은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또 세상 속에서는 지독하리만큼 처절한 피해자가 되는 인물들이다.

 

[초록 물고기]의 막동, [박하사탕]의 영호, [오아시스]의 종두,

그리고 [밀양]의 신애처럼 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독한 현실 속에 직접적으로 부딪혀가며 고통 받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 속 미자는 조금 다르다.

 

 

이제 66세가 된 그녀는 직접 세상에 뛰어 들기보다 모든 것을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지켜보고, 또 느낀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닌,

그리고 아들이나 딸도 아닌 손자라는 점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손자를 지켜보며 아파하고, 또 고통 받는다. 마치 자연과 사물을

한 발짝 물러서서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하고,

느끼는 시인의 모습처럼 미자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또 아픔을 느낀다.

 

그래서 제목인 ‘시(詩)’와 미자는 참 닮아 있다. 시는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 다른 대상 혹은 은유 및 비유를 통해 느끼는 감정을

간접적으로 옮겨 적는다. 영화 속 사건과 손자의 입장이 아닌

그것들을 지켜보며 느끼는 미자의 감정을 통해 우리 역시

그녀를 바라보고, 또 그녀의 가슴을 느끼게 되듯이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이 모두 관객들 스스로가 주인공들과 함께 사건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그들을 이해하고, 느끼게 해주었던

소설과 같은 작품들이었다면, 이번 영화 [시]는 관객들이 영화 속으로

직접 뛰어들기보다 관찰자인 미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시와 같은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보다 조금 더 정적이고,

보다 많은 여백을 가진 영화다.

 

이것은 어쩌면 제목인 ‘시’가 주는 이미지의 반영일수도 있고,

전작들과는 다른 입장의 주인공이 화자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기인된다.

그래서일까 이창동 감독이 이번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한층 더 깊어지고, 또 너그러워졌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그것을 느끼는 가슴이 다름 아닌 66년이란

세월을 이 세상 속에서 아무 말 없이 버티며 살아 온 미자의 눈과

가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너무도 적은 세월을 살아 온 우리들은 아직 그런 눈과 가슴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미자를 통해 대신 보여준다.

 

그녀의 순수하면서도 깊은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의 현실과 너그러운

가슴으로써 느끼는 삶의 진한 의미를 말이다.

 

 

소녀의 마음을 가진 66세 미자와 그녀를 닮은 ‘시(詩)’를 통해

또 하나의 순수, 그리고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다.

 

순수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정작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시(詩)’로써 전하다.

 

 

삶의 의미와 현실의 이면을 전하되 김기덕 감독처럼 불편하지 않고,

사람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하되 홍상수 감독처럼 노골적이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다.

 

 

그의 새 영화 [시] 역시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삶과 사람에 대한 시선이

같은 맥락으로 흐른다.

그의 영화들 속 현실은 폭력과 욕망([초록 물고기]와 [박하사탕]),

편견([오아시스]), 그리고 모순([밀양])으로 가득하다.

 

영화 [시] 속에서 미자가 살아가는 현실 역시 그러하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간병인을 하며 받는 품삯과 정부보조금으로

홀로 손자를 키우며 살아가는 66세의 미자는 빠듯한 일상이지만

그저 손자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과 시를 쓰는 데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푸른 나무와 길가에 핀 붉은 맨드라미 꽃 등 그녀는 시를 쓰기 위해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또 아름다운 생각들만 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닥친 한 사건은 더 이상 그녀를 자신만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살지 못하도록 만든다. 자꾸만 잊어가고,

또 한 눈 팔기도 하지만 현실은 지독하리만큼 미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이 점 역시 미자가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 속 인물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점이다. 전작들의 주인공들이 현실 속에 부딪혀

스스로 순수를 잃고, 다시 그 순수를 되새김질 한 것과 달리 영화

[시]의 미자는 자신이 간직한 순수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내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초록 물고기]와 [박하사탕]을 통해 폭력에 짓밟힌 순수를 이야기했고,

 

[오아시스]를 통해 편견 없는 순수한 사랑에 대해 질문했던 이창동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역시 소녀 같은 주인공 미자와 그녀가 그토록 완성하고

싶어 한 ‘시詩’를 통해 다시 한번 순수를 이야기한다.

 

극중 기범이 아버지의 말처럼 주변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꽃무늬 옷들과 하얀 모자, 꽃과 나무를 좋아하고, 아무 곳에나 앉아

혼잣말을 하는 미자의 모습은 천상 10대의 순수한 문학소녀다.

 

그리고 그녀가 배우고, 또 사랑하는 시는 가장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문학이다. 어쩌면 소녀 같은 마음을 가진 미자와 그녀가 쓰고자하는 시는

지독하고, 이기적인, 그래서 지금 현실과는 동떨어진 존재들이다.

언제나 그랬듯 이창동 감독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 순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소재들을 불러낸다.

 

그것은 곧 그의 작품들이 가진 제목이기도 하다.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그리고 햇빛과 시는 모두 그런 존재들이다. 이처럼 가장

순수한 마음을 가진 미자와 ‘시’의 만남은 그래서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더욱 쓰리고, 또 따갑게 비추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극중 시 강좌 수강생들이 ‘내 인생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돌아가며 발표하는 장면은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닌다.

 

자신을 키워 준 할머니께 노래를 가르쳐 드렸던 순간, 느지막이 첫 아이를

낳던 순간, 반지하방에서 임대 아파트를 얻어 들어가던 순간,

비록 이루어질 수 없지만 뜨거운 사랑을 느꼈던 순간,

그리고 미자의 어린 시절까지. 누구에게나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은 존재한다.

그렇다고 그 순간들이 저마다 거창하고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

가장 순수하게 사랑했고, 기뻐했으며, 또 감사했었던 기억들이 모두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수강생들이 발표했던 그 순간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아름다웠던 한 기억일 뿐이다. 바로 이처럼

더 이상 현실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순수에 대한 그리움을 관객들

역시도 함께 느끼게 되고, 그 순간들을 발표하며 울먹이는 저들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 또한 눈물짓게 되는 것이다.

 

반면 시 낭송회에서 시보다는 언제나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게 우선인

중년 남성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들은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바로 지금 현실 속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은 마치 벌거벗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만 바라볼 수 없는, 그런 지저분해진 벌거숭이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듯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 모두가 마치 시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현실 속 우리 자신은 그저 그런 음담패설의 주인공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느냐고.

 

한편, 미자가 듣게 되는 시 강좌의 강사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끼며, 그것을 글로 옮겨 적으라고 말한다.

그렇다. 시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문학이다. 하지만 미자는 시를

쓰는 게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계속 질문한다. 시를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냐고. 하지만 그녀는 어느 누구에서도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

이유는 세상은 시를 쓸 만큼 아름답지 못하고, 또 아름다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리 예쁜 꽃들과 푸른 나무를 보며 시상을 떠올려 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은 그저 꽃 한 송이와 나무 한 그루에 불과함을

영화는 보여준다. 만약 세상에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마치

미자가 병원에서 본 빨간 ‘조화’처럼 만들어진, 만들어져야만 보이는

그런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럼에도 미자는 결국 유일하게 시를 완성한다.

 

그 시는 미자가 살고 있는 지금 세상에 피어 있는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가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움 대신 짓밟혀 가는 아픔 속에서

그것을 참아내며 완성한 시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를 닮은 한 소녀의

바람이 담긴 시다.

 

두 눈을 가리고 바라 본 세상, 즉 아름다움이 있을 지도 모르는

그 어느 세상을 향해 노래한 것이다. 바로 성녀 아네스와 같은 마음으로

바라 본 세상을 향한 노래인 것이다.

 

‘소녀는 죽었다’....그리고 ‘시도 죽었다’...

이창동 감독이 말하는 잔인한 인간들의 거울, 아이러니한 현실의 노래!!

그리고 가만히, 조심스레 비춰주는 한 줄기 햇볕!!

 

영화는 시작과 함께 ‘소녀는 죽었다’라고 말한다.

 

영화 [시]의 오프닝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중에서 가장 독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장 직접적인 오프닝이다.

잔잔하고 평화롭게 흐르는 강물, 그리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목소리와 함께 멀리서 떠내려 오는 그 무언가를 비추며 영화는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는 바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미자의 평범한 일상을 비춘다.

사실 비단 영화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 투성이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흐려진 건 오래전 일이고,

가치의 경중이 뒤바뀐 것들 역시 허다하다. 미자는 그렇게 아이러니한

현실을 바라보고, 또 그러한 삶을 그녀 스스로가 선택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미자 스스로가 아무리 잊어가고, 또 잊으려 해도 현실은

자꾸만 되풀이해서 자신을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세상의 순수를 짓밟고, 또 순수를 잃어버린 속물 같은 존재들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순수를

지켜주기 위해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또 그들 앞에서 작아진다.

그것이 곧 미자의 현실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아이러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술에 취한 한 젊은 시인은 ‘시는 이제 죽었다’라고

말을 한다. 그렇다. 이제 더 이상 시를 잃는 사람도, 또 시를 쓰는 사람도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시를 쓰는 일보다 지켜내는 일이 더 어려워져 버렸다.

그래서 그토록 시를 쓰고자하는 미자의 마음을 어느 누구도

헤아려 주지 못한다.

 

이미 죽어가는 시를 살려내기에 미자는 너무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앞서 말한 ‘소녀의 죽음’, 그리고 ‘시의 죽음’은 곧 우리의 현실 속

순수의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미자는 영화 속에서 시를 완성한다.

아니 유일하게 홀로 시를 쓴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창동 감독은 아무리 아이러니하고,

시궁창처럼 지저분해진 현실일지라도 누구에게나 순수를 떠올리고,

또 작으나마 그 순수를 간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비록 그것이 현실 속에서 또 다시 밟혀지고, 또 아플지라도 매번

순수에 대한 작은 희망을 한 가닥 비춰준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 속 엔딩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는 가느다란 햇볕들은

어쩌면 그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초록 물고기]의 엔딩, [박하사탕]에서 마지막 영호를 비춰주던 햇볕,

[오아시스]에서 공주의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온 작은 햇볕과 [밀양]

속 마지막을 비추던 햇볕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리고 [시] 속의 미자 역시도 그녀를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 존재한다.

 

커다란 나무의 수북한 잎사귀들 사이로, 그리고 맑은 여름날 하늘에

떠있는 구름 사이로, 그렇게 미자를 비춰주는 아름답고,

따뜻한 햇볕이 있다.

 

관객들에게 다시한번 넌지시 건네는 질문, ‘용서’!!

그 해답은 이번에도 관객들 스스로가 찾아내야 할

몫으로 남겨두었다!!

 

 

전작인 영화 [밀양]을 통해 용서의 의미와 그것이 가진 아이러니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이창동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넌지시 그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조금은 다르다.

그리고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이지도 않다.

 

다만 지극히 인간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면에서의 질문을 던져 놓는다.

영화 [밀양]이 용서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면,

이번 영화 [시]는 용서받는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대가,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한 해답을 구한다.

 

미자는 누군가에게 용서 받고자 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순수한,

그리고 도덕적인 의미의 용서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용서받고자 한다면 보이는 대가를 치르길 원한다.

미자와 함께 모인 다섯 명의 남자들처럼 말이다.

그 중 어느 누구도 진심어린, 그리고 순수한 의미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오직 미자만이 그런 용서를 받고자 할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힘들어 한다. 손자를 흔들어 깨우며 다그쳐 보기도 하고,

솟구쳐 오르는 슬픔을 억눌러 보기도 하며, 또 현실을 외면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결국 미자는 현실로 돌아 와 현실이 원하는 방법대로

용서를 구하고, 또 선택한다.

 

미자의 선택은 어쩌면 희생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지 모른다.

순수하게 도덕적인 용서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희생’은

가장 순수하게 용서 받을 수 있는 작은 대가라고 말한다.

그것은 미자가 길가에 떨어진 살구를 보며 메모한 내용에서도 엿보인다.

다음 생을 위해 스스로 깨어지고 밟히는 살구의 모습은 마치 미자를

그대로 닮아 있다.

 

누군가에게 용서받고자 하는 미자는 결국 그 방법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깨어지고, 밟히게 하는 희생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마음 속

짐과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것인지, 혹은 미자가 지키려한 그 사람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해답은 관객 스스로가 결정할 몫이다.

그래서 이창동 감독 영화에는 정답이 없다.

하지만 관객 스스로가 정답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사실 이번 영화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여백이 많은,

고로 관객 스스로가 채워야 할 여지를 많이 남겨 놓은 작품이다.

전작인 [밀양]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영화 역시 관객들에게 질문만을

던져 놓고, 감독은 유유히 모습을 감춘다.

관객 스스로가 느끼고, 선택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영화 [시]의 운율이 되어 준 일상과 자연의 소리들...!! 음악을 비우고,

소리로써 여백을 남겨두다. 그리고... 미자는 노래한다.

 

 

시에는 운율이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는 음악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음악이 하나의 큰 이미지를 만든다.

 

[박하사탕]의 메인테마곡이 그러했고, [밀양]의 ‘Christian Basso 의 Criollo’란

곡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 [시]는 조금 특별하다.

 

어느 장면에서도 음악이 없다. 대신 소리가 존재한다. 조용하고 유유하게

흐르는 강물소리와 함께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소리로 시작되는 오프닝 장면은 엔딩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창동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음악 대신 강물소리를 메인테마로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흔히 들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소리들을

음악으로 사용했다.

 

여기저기 지저귀는 새 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빗소리와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등이 그것이다. 이 또한 어느 음악으로도 채워 넣을 수 없는 감성들을

관객들 스스로가 장면마다 스스로 채워 넣기를 바란 의도일지 모른다.

 

이창동 감독이 선택한 음악들은 서로 다른 느낌들이 공존한다. 잔잔하고,

차분하지만 그 속에는 요동치듯 꿈틀대는 슬픔과 아픔이 녹아 있다.

 

영화 [시]의 오프닝과 엔딩장면에서 들려주는 강물소리 역시 그렇다.

관객들은 처음과 끝에서의 강물소리가 어떻게 달려졌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관객 스스로 발견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음악이 빠진 자리를 소리가 대신했지만, 주인공은 여전히 노래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언제나 그러했듯 [시]의 미자도 노래한다.

[초록 물고기] 속 밤무대 가수 미애, [박하사탕]에서 ‘나 어떡해’를 불러대던

영호, [오아이스]에서의 종두와 [밀양] 속 신애처럼 미자 역시 노래를 부른다.

 

노래방과는 어울리지 않게 걸려 있는 그림 속 소녀의 모습처럼,

자신을 닮아 있는 그 소녀의 그림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미자의 모습을 비춘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노래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지독한 현실을 원망하며

오열하듯 노래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현실을 잠시 접어두고 조심스레

마이크를 든다. 그래서 그들의 노래는 언제나 처량하고, 애처롭다.

아무리 신나는 곡을 불러도 눈물이 나고,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한

표정이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왜 그럴까?

 

관객들은 이미 그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렇게 그들의 현실을 보았고, 또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가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깊은 시선과 뜨거운 가슴으로 ‘미자’를 살아 숨 쉬게 한

원로배우 윤정희의 기품 있는 연기!!

남성적 시어 김희라와 안내상, 그리고 이다윗을 통해

풍겨내는 사람 향기!!  

 

감독이 시인이라면 그의 시 속에는 배우라는 시어가 존재한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에는 언제나 멋진 시어들이 존재했다.

 

한석규, 설경구, 문소리, 전도연, 그리고 송강호 등.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

이창동 감독이 선택한 시어는 원로배우 ‘윤정희’다.

 

배우 윤정희는 이번 영화 속 ‘미자’ 그 자체로써 살아 숨 쉰다.

그녀의 본명이기도 하고, 실제 나이이기도 한 66세의 ‘미자’는

윤정희라는 배우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뜬금없이 감상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사람들마다 시를

어떻게 해야 쓸 수 있냐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하며,

문득문득 자리에 주저앉아 꽃을 보며 혼자 말하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천상 순수한 소녀의 모습이다.

 

배우 윤정희는 이러한 소녀의 감성부터 현실의 모든 아픔과 때를 스스로

씻어 내려하는 66세 노년의 감정까지 깊이 있는 연기로써 보여준다.

특히, 손자를 다그치며 자신의 감정을 짓누르는 장면이나 너무도

자연스럽게 베어 나오는 생활연기는 그녀의 연륜이 흠뻑 베어 나온다.

 

쉽지 않았을 노출 연기의 과감함 역시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특유의

나지막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조심스러운 움직임들, 그리고

깊이 팬 주름에서 그려지는 연륜과 깊이 있는 시선, 선한 미소에서

풍기는 기품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가 이른바 ‘여배우 트로이카’를

주도했던 60년대 최고의 여배우 였음을 새삼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배우 윤정희가 지극히 여성적 시어의 존재였다면 그와 상반되는

남성적 시어의 존재는 원로배우 김희라라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모습을 비춘 그는 극중 미자가 간병하는

중풍 노인으로 등장하여 극단적이지만 한편으로 무기력해진

남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욱이 미자로 하여금 아이러니한 선택을 하게하고, 다시 내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캐릭터로써 김희라의 존재감은 영화 속에서

확실히 묵직함으로 다가온다. 한편, 속물적이지만 현실에 가장 순응하며

살아가는 기범이 아버지를 연기한 배우 안내상의 연기도 인상적이며,

미자가 듣는 시 강좌의 강사 ‘김용탁’ 시인을 연기한

김용택 시인의 등장도 반갑다.

 

그리고 미자의 중학생 손자를 연기한 아역배우 이다윗 군의 사춘기 소년의

감성연기 역시 눈여겨 볼만하다. 이창동 감독은 언제나 자신의 각본을

가장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를 찾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선택과 언제나 적중했고, 배우들로 하여금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도록 했다.

 

이번 영화 [시]의 윤정희 역시 그렇다. 배우 윤정희의 깊은 눈과

나지막한 목소리, 그리고 기품 있는 연기는 매 장면마다 관객들에게

진한 여운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진정한 배우란 많은

연기가 아니라, 단 한 번 일지라도 깊은 연기로써 관객들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함을 무려 16년 만에 영화 [시]로 스크린 앞에 선 그녀,

바로 원로배우 윤정희가 우리들에게 증명해 보인 셈이다.

 

세상의 모든 영화는 시(詩)다. 누군가는 멋진 CG로 그것을 완성하고,

또 어떤 이는 잔혹한 방법으로 써 내려가는 등 단지 방법의 차이일 뿐

세상의 모든 영화는 시와 같다. 그리고 감독은 시인이 된다.

 

이창동 감독의 [시 詩]는 영화의 제목인 동시에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이창동 감독의 방식이기도 하며, 그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시작에서 강물소리와 함께 보여주었던 한 소녀의 뒷모습은

영화가 끝나면서 살며시 고개를 돌린다.

 

마치 어느 시 한 편의 수미상관처럼 영화 [시]는 그렇게 여운을 남겨준다.

언제나 그는 현실을 역설(아이러니)과 반어로 이야기한다.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을 때로는 직설적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매번 무언가에 빗대어 은유로써 표현한다.

 

시이기에 허용되는 많은 시적허용들처럼 때로는 영화이기에

허용될 수 있는 모습들도 존재하며, ‘사람’이라는 화자를 통해 ‘삶’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요, 제목인 ‘시 詩’가 지닌 의미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미자의 시 '아네스의 노래'는

죽은 소녀의 노래이자, 곧 미자의 노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나아가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의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미자가 쓴 시의 마지막은 어쩌면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지 모른다.

 

채우지 못한 한 줄은 영화를 보고, 느끼게 될 관객 스스로가 채워 넣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창동 감독의 ‘시詩’는 관객들과 함께 완성되어 질 것이다.

 

그가 관객들을 위해 남겨 놓은 작고 하얀 종이의 여백을 채워 넣듯이.

 

 

. 영화 시에 나온 다섯편의 시

http://pub.paran.com/sallysulbo/poem/poet.htm


. 이창동 감독과 그의 작품에 관한 포스트 : ↓

http://blog.naver.com/jintae815/60106125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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