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31일 월요일

인간은 얼마나 살 수 있는 것인가? / 오세경

. 인간은 과연 얼마나 살 수 있는 것인가?

 

 

누군가는 남아 이 인생의 유한함을 관해 너털거리며 비웃기라도 했으면 싶다.

 

18세기나 17세기쯤에 살다 아직도 더 살아, 생존하면서

이 지구상에 사라져 버린 모든 유한한 인간의 존재에 관해 비웃으면서,


바람이 옷깃을 스쳐 지나가듯

인생의 유한함을 가소로히 츠어다 보는 그런 존재가 하나쯤은 ...

이 넓디넓은 지구상 위에 단 한 명쯤은 ...

살아 남아 있지는 않을런지 ...

 

그렇게 새기다 보면

생이란 얼마나 허망하고 유한한 것인가? 다시 생각이 든다.


숱한 사연 속에 세월이 흐르고 흘러, 지나간 존재들이

거쳐간 그 자취 뒤로

어느듯 새로운 생명체들은 다시 채워지고 ...

우린 때가 되면 모다다 그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다시 상상해 본다.

 

이 세상 어디엔가 단 한명은 살아남아 ...

 

풋풋치 지나가 버린

어느 지나간 그 한 세기를 누비던,

미국 서부의 거친땅을 훼집고 다니며
쌍권총을 쏴대며 말을 내달리던
어느 무법자의 난폭함에 대하여 ...

 

춥디추운 러시아 빙판길을 넘어 알래스카 빙하땅을 도하하는
어느 인디언 후예의 질기디 질긴 행진의 발자취를 ...

 

가끔 우릴 놀래키는 아직도 생생한 맘모스의 화석을 보면서
절벽 벼랑 아래로 횃불로 디리밀어 떨어뜨려
사망한 맘모스의 거대한 살점덩이를 어깨에 둘러매고
자신이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대리는

그 어느 아낙을 위해
콧노랠 부르며 타박타박 걸어오는

그 어느
원시인의 귀로에 대해서 ...

 

이런저런 모든 사연을

다 기억해 내며 그 목도를 증언해 줄
그 어느 불가사히한 존재의 불멸에 관해 ...

 

인생은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짧트랗고 유한하다.

 

지나고 보면 말이다.

 

어린 시절 뛰어 놀던
옛 고향 언덕의 뒷동산에 울려 퍼지던
메기의 노래가 오늘도 황혼속에 잠겨 흥살스럽다.





 

   
몇몇의 신화적인 인물을 제외하고는, 인간은 한번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젊을 때 아무리 기력이 좋고 권력이 당당한 사람이라도 늙으면 그 대단하던 기세를 찾을 수가 없게되고, 결국은 그도 인생을 끝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의 인생을 되도록 오래 살아 보려고 하는 것은 누구나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이다. 특히, 권력이 당당했던 사람이면 더욱더 그러하였다. 예를 든다면, 중국의 진시황제가 외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불로초를 구하러 사람을 보냈다던가, 또는 독일의 Adolf Hitler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들의 골수를 냉동 저장하였다가 후일에 자기에게 이식하려고 하였다던가 등등의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사람의 성장 호르몬이 발달되기까지의 17년을 계기로 하여 이것이 점점 쇠퇴하여 마멸되기까지 그의 3배가되는 시간인 51년까지를 합하여, 약 68년이 우리의 수명이라고 한다. 인간의 역사중에서 과학이 최고도로 발달된 20 세기와 21세기에 들어서도, 선진국의 평균 수명이 70-80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시편 91편 10절) 라고 한 것을 보아, 이러한 사실은 몇 천년을 두고도 잘 관찰된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동물의 발육시기에 영양 공급을 극히 제한하면, 수명을 약 30% 증가시킬 수 있다고 하니,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수명이 약 90세에까지도 증가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실례는 우리의 이웃인 일본사람의 생활에서도 입증이 되고 있다.

 

대개의 일본인들은 대단히 적은 량의 식사를 함으로 영양분 섭취가 제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의학으로는,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하여도, 인간의 평균 수명이 100살을 훨씬 능가하기 힘들다. 이렇게, 100년 남짓한 인간의 수명은, 생물 중에서도 몇 백년을 산다고 하는 거북이나, 몇 천년을 살아온 California의 giant sequoia 나무에 비한다면 비교적 짧은 편이다.

 

생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우리의 체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우리의 생명 줄이라고 할 수 있는 telomere의 염기가 매번 약 50개씩 줄어들게 됨으로 세포분열을 무한정으로 계속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염색체의 염기가 탕진해 버릴 것이니,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은 과학적인 견지에서 보더라도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telomere와 그를 연장시키는 효소, telomerase를 발견한 사람들이 지난해 (2009) nobel 상을 수상한 것을 보더라도, 이 염색체가 얼마나 생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100년 남짓한 생명의 도상에서도, 세포의 분열과정이나 또는 유전자의 복제과정에서 치명적인 시행착오가 생겨 우리의 유전자가 변질되어 암세포로 변하면, 이로써 우리의 생명은 아무 때라도 단절되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생명이 60을 지나 80, 90세에 이른다고 하여도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65세 이상의 25%, 그리고 85세 이상의 사람은 50%가 치매 병에 걸린다고 하니, 이러한 사람들은 아무리 육체가 온전해 보이더라도 그들의 사고 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완전한 인간의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제한적인 수명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들의 짧고 긴 수명에 관계없이, 여러 방면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또는 불멸의 걸작품을 만들어 낸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애국시인 윤동주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인의 생체실험 대상으로 아깝게도 희생되었으나, 그가 남긴 시와 편지들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우리 국민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삶이 되고자 굴러가는 낙엽 소리에도 괴로워했다” 고 고백하던 그는, 신을 두려워하는 민감한 기독 청년으로써 그의 애틋한 정서와 순결한 양심은 오늘날 한국의 많은 기독신자들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다. 의사로써 영국이 낳은 천재시인 John Keats 역시 26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사하였으나, 그가 남긴 수많은 시들은 영국을 문호의 나라로 불리게 하도록 공헌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Austria에서 출생한 Schubert 도 31세의 젊은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하였으나, 그는 짧은 생애에 수많은 가곡을 작곡하여 오늘날 그는 “가곡의 왕” 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는 당시에 독일의 문호였던 Goethe의 작품을 주제로 삼아 그의 문학작품을 곡조로 옮겼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께서 받는 용돈이 너무도 부족하여 오선지조차 살 돈이 없었고, 친구의 도움이 없을 때는 배고픔을 면치 못하던 불우한 환경에서도, 자연을 사랑하고 인정을 그리워한 그의 애틋한 정서는 오늘날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매우 안타깝게 한다.

 

또는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리는 Mozart도 역시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명을 알 수 없는 질환으로 사망하였다. Mozart 역시, 그의 천재적인 소질을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어느 귀족에게서는 상당히 굴욕적인 행패까지 받았으나, 오늘날 그 귀족의 이름은 아무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 오직 Mozart 의 천재적인 음악만은 그가 죽은지 200년이 넘도록 만인이 만끽하고 있으니, 이런 모욕적인 가시는 오히려 그가 더욱 분발하여 더 많은 작곡을 남기는데 박차를 가했을 뿐이다.

 

거의 200년동안이나 숨겨져 있었던 J. S. Bach 의 작곡을 다시 소생시킨 Felix Mendelssohn과, 건반의 시인이라고 알려진 Frederick Chopin 도 각각 38세 그리고 39세의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현대의 항생제로 치료할 수 있었던 아까운 죽음들이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Roma가 만들어 놓은 십자가의 형틀에서 최악의 인간죄수로 그의 생애를 끝냈으나, 그의 죽음은 그후 2000년간의 인간 역사의 판도를 바꾸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출생과 공생활, 그리고 그의 죽음은 중세 Europe의 문예부흥의 테마가 되었다. 이탈리의 미술가 Michelangelo 가 그린 바티칸 궁전의 시스터인 회당 벽화와 그의 제일 유명한 조각품의 하나인 Pieta, 또는 Leonaldo Da Vinci가 그린 최후의 만찬, Rembrandt가 그린 탕자 등등의 미술 작품을 비롯하여 Bach의 B minor Mass, 600개가 넘는 그의 Cantata, 또는 Handel 의 Messiah, Beethoven의 교향곡 9번을 비롯한 무수한 음악 작품들이 다 성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Victor Hugo의 명작 Les Miserables, 또는 Charles Dickens 의 Christmas Carol 등등의 문학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한 인생이 남긴 유산은 참으로 거대하다.

 

그의 영향력은 이런 문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Constantine 대제가 Roma를 정복한 이후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을 비롯하여, 중세의 십자가 운동, 바티칸 궁전의 교황청 분립, 2차 대전을 전후로한 유태인 대학살, 오늘날의 Israel과 Palestinian들과의 대립 등등, 종교는 물론 정치와 선교와 경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항력이 제한된 곳이 없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겨누어 볼 때,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이런 젊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인하여 발전되고 개선되어 온 듯하다.

 

물론, 모든 역사적인 인물들이 다 젊었을 때 죽은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문예부흥시의 천재라고 알려진 Leonaldo Da Vinci, 음악의 성자라 불리는 Ludwig van Beethoven, 그리도 실낙원을 쓴 영국의 종교가 John Milton 등도 50여세까지 인생을 즐겼다. 무수한 종교음악 작품을 남겨서, 그가 종교음악의 구약성경을 만들었다고 하는 J. S. Bach, 그리고 Beethoven 이 가장 숭배했던 음악가라고 하는 George Frederick Handel, 또는 Mozart와 Beethoven의 스승이었던 papa Haydn도 60, 또는 70세에 이르도록 비교적 오랜 작품생활을 영유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역병이 창궐하였던 중세의 Italy에서 태어난 Michelangelo는 거의 90세에 이르기까지 장수하여서 수없이 많은 걸작품을 남겨주었다.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그는 70여세에 이르러 Vittorio Corona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속삭이며 수 편의 sonnet을 지어서 남기기도 하였다. 사생아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늘 불안정한 생활을 하였던 Leonaldo Da Vinci와는 달리, 그는 비록 독신생활을 하였지만, 그의 가족들에게 충실한 인물이었고 훌륭한 인격자였다. 불란서 문학의 거장이었던 Victor Hugo와 독일의 시인이고 극작가이었던 Johann W. von Goethe 역시 80세를 훨씬 넘는 긴 인생을 누렸다.


이와 같이 고작해야 100년 남짓한 인생을 가지고도 이 인생을 최대한으로 사용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하루에 4시간 남짓한 수면으로 연구에 전념한 발명왕 Thomas Edison 은 1000개가 넘는 특허와 3500권에 달하는 연구 notebook을 남겨 주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모든 인물들이 다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소질을 보여주고 이를 끝까지 이끌어 간 사람만은 아니었다. 직업군인으로써 따분한 군대생활을 하던 아이젠하워 장군은 50세 이후에 연합군을 지휘하여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Mount Rushmore에 4명의 대통령을 조각한 Borglum도 60여세의 나이에 이 일을 시작하여 70여세의 나이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무일푼의 실직자였던 colonel Sanders도 60세의 나이에 KFC 사업을 시작하여 그의 생전에 백만장자가 되었다.

 

 이러한 소위 ‘late bloomer’들은 그들이 적재적소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어라 하여도 그들의 특출한 재능과 노력, 그리고 행운이 없이는 이런 큰일을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인류 역사에 영원히 기념될 인물 중에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친 사람도 여럿이나 있었다. 인간을 속죄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 예수가 있는가 하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남북전쟁을 감행하여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있었다. 그는 결국, 적의 총탄에 맞아 암살되었지만,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미국의 오바마와 같은 흑인 대통령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Nobel상을 두 번이나 받았으며, Radium institute를 세워서 그의 딸과 사위까지도 노벨상을 받는데 기여한 퀴리부인는 방사선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다가, 마침내는 그의 골수 세포가 다 파괴되어서 60 여세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희생은 후일 수많은 사람들이 항암치료를 받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영국의 탐험가이며 의료선교사 이었던 데이빗 리빙스톤은 아프리카 열대 지방의 온갖 질병과 싸우며 야수와 식인종이 들끓는 밀림을 헤쳐가며 이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노예매매를 일삼는 아랍 상인들의 난행을 저지하며 복음을 전파하다가 식량과 식수가 모두 절단되었을 때, 그의 마지막 피까지도 아프리카의 red ants 들에게 빨리 운 후 피골이 상접되어 운명하였다. 그의 마지막 기도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으로 미국과, 영국, 그리고 터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아물지 않은 상처(아프리카 대륙)를 치료하게 하옵소서”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희생과 애절한 기도는 20세기에 들어와 아프리카 대륙을 세계에 개방시키고 그들의 참담한 생활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하여, 좀더 고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꺼이 바칠 수 있었던 이들에게서 우리는 신(God)과도 같은 위대함을 느낄 수가 있다. 다행하게도 20세기의 성자들은 이런 아까운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20세기의 성자라고 불리는 알버트 슈바이처박사는 의사이고 음악가이며 또한 훌륭한 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문명 생활을 등지고 아프리카에 들어가 의료 선교사로써 일생을 바쳤다. 테레사수녀도 그의 모국 벨기에을 떠나 인도에 들어가 의료봉사를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이들도 역시 개인의 안이함을 희생하고 남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한 점은 드높이 칭송할 일이다.

 

과학 문명이 최고로 발달된 20세기와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생체 적인 모든 여건을 최상으로 만들면 인간의 생명을 120세까지 연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죽음을 피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우리 인생은 문제는, 이 주어진 수명을 가지고 무슨 목적을 이루는데 보내고, 또 얼마나 열심히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비단 얼마나 더 오래 살수 있는가를 궁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인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인생의 어느 시점에 달해있고 어떠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 100년의 인생을 하루 24시간으로 비교하여 계산한다면, 우리의 나이가 하루의 어느 때쯤에 와 있는가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우리의 나이가 40세라면, 우리는 아침 10시경이고 60세라면 오후 3시, 그리고 우리의 나이가 80세라면, 오후 8시경인데, 이 때쯤에는 하루의 일과가 다 끝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시간이다. 내가 살고있는 뉴튼 근교에는, 남이 다 은퇴한 이후에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연령이 80, 90을 넘었어도 아직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있는가 하면, 99세의 고령에도 아직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가도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의 시시각각은 참으로 귀중하고도 아름다운 것이다. 더욱이나, 한번가면 다시 되 찾을 수 없기에. 우리의 인생이 과연 얼마나 남아있으며, 이 남은 기간에 우리는 무엇을 하다가 끝마침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종교인들은 우리의 생명이 끝나면 우리의 영혼은 조물주를 만나게 될 것이며 동시에 그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믿는다. 이와 반대로 몇몇의 과학자들은, 우리의 생명이 끝나면, 우리의 이성과 영혼도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이것은 마치, 컴퓨터에 전기가 나간 것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특히, 1950년도에 노벨상을 받은 Francis Crick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대의 Egypt 사람들은 영혼 불멸설을 믿었고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믿고 있으며 힌두교도 들은 생명의 윤회설을 믿고 있다. 이 세 가지의 믿음중, 가장 과학적인 증거를 가진 관념을 논한다면, 아마도 기독교인들이 믿는 부활의 관념일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부활하셔서 여러 번이나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으니까, 그것이 재생의 증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재생은 우리가 현재의 지식만으로는 터득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이러한 일은 터구니없는 몽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영원을 바라보고 삶으로써 우리 인생의 궤도를 제대로 정해주고, 또한 장래에 대한 희망을 안고 기쁘게 살아가게 한다면, 우리가 택할 길은 엄연하지 않은가. 끝으로 John Keats의 죽음에 대한 시를 인용하며 이 글은 맺는다.

 

 ( 인생이 오직 꿈일 뿐이며, 환희의 장면들이 유령처럼 지나간다면, 죽음은 다만 꿈이 아닐까? 찰나의 기쁨이 환상같이 지나는데도 죽는다는 것의 우리의 최악의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가 )

( 지상의 인간들이 땅위를 방황하고 슬픔의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이 역경의 인생을 저버리지도 아니하며, 드디어는 깨어나고야 말 장래의 운명조차도 홀로 주시하려 하지 않음은 기이한 일이 아닌가 )

 

 

독자기고 / 오세경 (보스톤코리아)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