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중세 유럽의 동성애자와 중세의 목욕탕

 

. 중세 유럽에서 동성애자들은 사형에 처했다. / 양태자

 

 

요즈음 동성애를 소재로 한 모 방송사의 드라마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어느새 한국에서도 동성애가 드라마에 등장하는 시대가 됐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동성애가 지금까지 다소 귀퉁이의 문화로 대접 받았다 할지라도 어느 시대 어떤 민족에게도 공통적인 인간 문화사로 남아 있으니 동성애도 인간의 문화사 중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사실 거의 비판적이지 긍정하는 글을 쓴 문화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남아메리카의 잉카, 마야 문명에도 동성애에 대한 자취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동성애가 역사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기원전 378년께는 300명의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군사단체가 존재했다.

 

이들은 일단 딸린 가족이 없이 동성애를 즐기는 군인단체들이었기에 전쟁 시에는 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다해 싸움을 했단다.


또한 역사 속에 남겨진 이런 동성애 인물들을 언급하자면 수 없이 많다.

 

몇몇 사료에 의해 언급하자면
로마황제 하드리안(77~기원 후 138), 알렉산더 대왕(356~기원전 323),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교황 식스투스 4세(1414~1484) 등을 들 수 있다.

 

중세유럽의 동성애도 주로 역사의 귀퉁이에 감춰져 있다.

 

이들의 자취는 주로 법정 기록이나 재판의 판결문서를 통해서 알려지면서 오늘날 재조명된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떠했을까? 독일 학자들이 밝힌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자.

 

당시의 동성애자들은 중세 유럽 문화를 잘 대변하는 마녀사냥과 거의 동일한 죄목으로 다루어졌다고 한다. 그들도 마녀가 잡히는 것처럼 처절하게 추적당하고 죽임을 당했단다.

 

그 한 예로 중세 때 독일 레겐스부르크에서 17년간 동성애자로 살다 결국은 사형선고를 받고 목이 잘려 죽는 한 남자에 대한 연구 보고를 독일 헤르게뮬러 교수가 했다.

 

이 법정 기록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동성애 단어가 독일말로 조도미(Sodomie)이다.

 

이 단어는 오늘날 독일사전에는 동성 아니면 동물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하나 중세 때는 자연성을 거부한 성관계를 의미한다.

 

즉, 신이 부여한 남성과 여성 사이인 이성이 아닌 동성의 관계라는 것이다.

좀 더 확대해서 말하면 항문 성관계(Analverkehr)도 여기에 포함된단다.

 

중세의 취리히시 문서실에 의하면, 조도미는 법정문서에서 3번째 큰 죄목으로 간주됐다. 즉, 1400년부터 약 400년 사이에 총 1424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 중 747명은 개인범죄, 193명은 살인죄, 그리고 179명이 이 동성애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한다.

 

당시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마녀사냥으로 걸려든 이가 80명이었다니 이들은 동성애 죄목으로 사형 당한 이들에 비해 오히려 적은 숫자다.

후기로 갈수록 여기에 대한 처벌이 더 엄해진다.


동성애자를 새장이나 우리에 가둬 굶어 죽게 하거나, 공공장소에서 거세하거나 사지를 잘랐단다. 중세의 쾰른시 법정자료에 의하면, 200명의 동성애자들이 벌을 받았다 한다.

 

잘 알려진대로 그 때는 가톨릭교가 중세인들의 삶에 엄격하게 군림하던 시대였다.

 

말 할 것도 없이 동성애는 교회법과 성서계율의 잣대로 늘 배척 당한다.

 

말하자면 동일한 성과의 행위는 종족 보존의 차원에 위배되므로 당연 죄악시 되는 짓거리로 간주된다.  또 이런 행위를 지진이나 페스트의 원인으로 규정하면서 동성애자들을 불에 태워 죽인다.

 

그런데 사료에 언급된 재미있는 사실은, 서민 동성애자들에 비해 오히려 귀족들이나 수도자들이 동성애에 더 관심을 가졌단다.

 

이런 일이 중세의 수도원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 났다고 헤르게뮬러 교수도 전한다. 그러나 이후 역사적인 자취를 따라가 보면 사람들도 점차적으로 동성애를 인간의 한 단면으로 보기 시작한다.

 

오늘날은 중세 때처럼 화형 당하는 일은 생각지도 못 할뿐만 아니라 또한 더 이상 터부시 되지도 않는다. 더구나 ‘각 종교에 나타난 동성애자들’, ‘각 문화 안에 나타난 동성애자들’ 등의 제목이 붙은 테마로 오히려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추세다.

 

현재 동성결혼 법적 허용국가는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영국, 남아공화국, 미국의 매사추세츠, 캐나다 등이다.

 

이들 나라에선 이들은 법적인 부부로 인정되며 아이들 입양까지 동성커플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동성커플 결합을 인정한 나라로는 스웨덴, 헝가리,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포르투갈 등이 있다.

 

당시 많은 동성애자들을 화형시켰던 유럽국가들이 지금은 동성애에 관대한 나라로 분류된다. 지금 독일의 현직 베를린 시장(클라우스 보베라이트)도 동성애자다.

그는 독일 국민들에게 자기가 동성애자임을 텔레비전에서 당당하게 밝혔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2001년 이래로 3번이나 재당선된 베를린 시장이다.
독일인들은 그렇게 외친단다.


“동성애는 그의 사생활이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오직 더 발전하는 베를린을 위해서 애쓰는 시장을 뽑는 것”이라고. " ...

 

문제 제기를 하여 본다.

 

동성애를 용인하는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사실 이런 문제를 선악의 잣대라든지 아니면 찬반의 입장 등 어떤 형태로 다룬다 할지라도,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상당히 민감한 테마에 속한다는 것이다.

 


유럽 중세의 목욕탕

 

남녀혼탕, 십자군위안부…유럽의 뿌리깊은 매매춘

 

 

 

 

또한 중세유럽의 목욕탕을 살짝 들여다 보자.

거기에는 3년간 교육받은 수장격인 치료 목욕사가 늘 상주한다.


그는 손님의 머리도 깎아주고, 치아치료와 사혈뿐 아니라 다리수술 등 외과적인 치료까지 해준다.


당시 기독교적 사상으로 무장된 의사들은 성서적 교리에 따라 외과 치료시에 흘리게 되는 피와 접촉하는 걸 꺼렸다. 그래서 치료 목욕사가 피를 동반하는 외과치료를 대신 맡았던 것이다.

 

16세기부터 목욕문화가 쇠퇴기로 접어들자 이발사들이 18세기까지 이런 작업을 대신 했다.  당시에는 가발이 유행했으므로 가발사들이 이발사들과 대항하기도 했다. 이들은 세월이 가면서 가발사는 미용실로, 이발사는 남자 이발사로 정착하게 됐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의사들이 점점 더 이발사의 의료영역을 받아들이다
오늘날 서양의학의 외과로 자리잡게 됐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사람들은 하루에도 서너개의 목욕탕을 방문하면서 향략을 일삼았다. 요즈음의 골프장에서와 같이 당시에는 목욕탕에서 혼인이나 친구관계를 엮기도 하며 사교장소로 꽃을 피웠단다.


이렇게 탕에서 먹고 마시며 놀다 취한 상태에서 때론 싸움질까지 해댔고 덩달아 도둑과 사기꾼들까지 등장했다.

 

1400년께 한 여인이 법정판결로 자택에 감금당했다.


이때 그녀가 집을 잠시 떠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이 부여되는데, 하나는 성당에 고해 성사를 보러 갈 때, 다른 하나는 목욕탕에 가는 것만 허용 됐다 하니 당시의 일상이 얼마나 목욕과 연결되었는지를 잘 나타낸다.

 

이런 향략문화가 12~13세기엔 전성기를 이루고, 심지어 14세기 초부터는 결혼식의 피로연까지 목욕탕에서 열렸다.

목욕탕이 인기를 끌자 치료 목욕사들은 여자들을 고용해 매춘을 시작했다.


매춘녀들이 늘 상주하게 되자 치료 목욕사는 또 하나의 직함을 갖는데, 다름 아닌 뚜쟁이 역할인 것이다.
창녀가 있는 목욕탕에는 귀족과 평민 구별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탕에 들어가
판대기 위에 올려놓은 술과 음식으로 남녀가 서로 몸을 만질 수 있는 거리에서 향연을 즐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악사까지 동원돼 노래. 연주, 익살을 풀어내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딴 방에 놓인 침대로 가서 남녀가 즐겼단다.

 

당시에 이런 남녀혼탕 문화가 도처에 우후죽순처럼 번졌지만 중세 유럽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가톨릭이 여러 번 지나친 풍기문란을 경고했건만, 아랑곳 없이 더욱 더 무절제하고도 음탕한 장소로 변모해 갔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수도자들까지도 목욕탕에서 그들의 본분을 잊고 유별나게 즐겼다 한다.

 

또 하나의 중세유럽 매춘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은 14세기 말에 시 자체가 여인들을 고용해 만든 ‘여성들의 집’<그림>이다.  이들은 대개 하층민 출신으로 성적인 영업을 하다 보니 쉽게 성병에 걸릴 뿐더러 사회적인 대접 또한 형편없었다.


바깥 외출시에는 의무적으로 그들이 매춘녀라는 표시를 빨강, 노랑 그리고 그린 등의 색깔로 나타내고 다녔다.

 

도시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었지만 빈에는 노란 숄을 어깨에,
뮌헨 근교의 아우구스부르크에서는 그린 숄을 걸쳐야 했고,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노란색 단을 댄 옷을 입어야 했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그녀들의 수입 중 상당한 부분을
자신들의 사후세계를 위해 교회의 미사예물로 바쳐야 했던 것이다.


교회에 돈을 갖다 바치지 않으면 그녀들의 영혼이 연옥에서 더 오래 머물러야 한다고 믿었다.
그럼 자연적으로 천국으로 들어 가는 길이 지연된다는 것이다.


하기야 중세엔 교회의 복전함에 돈을 많이 넣어 돈 떨어지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조상령들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빨리 올라갔다고 믿었다 하니 오늘날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얼토당토 않은 믿음인 셈이다.

 

그런 그녀들이 드물게 잘 되는 경우는 수녀원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신분상승의 기회가 있는 귀족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첩 제도는 중세 십자군 원정과 연관성이 있다. 중세 기독교 십자군이 원정을 떠날 때 기독교인 여인들을 함께 데리고 다녔다. 이유는 십자군들이 이방인 여인들과 교통한다는 것은 죄에 해당됐기 때문이다.


이때 동반된 여인들의 역할은 다친 군인의 치료는 물론 매춘으로 십자군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풍습이 나중에 첩의 형태로 변모하게 됐는데 시대가 변해도 남녀 사이의 질투는 변함이 없었나 보다.
이야기인즉, 한 남자가 병이 들자 첩으로 있던 여인이 그 남자를 버리고 떠나버렸다.


그러자 그 병든 남자는 복면한 남자들을 보내 그 여자의 얼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 더 이상 딴 남자에게 갈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그 남자는 재판을 받게 됐다는 얘기가 법정기록으로 남아 전해진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여성의집이 16세기 말부터는 법적인 제재가 내려지면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목욕탕 역시 당시 유행하던 매독, 페스트, 그리고 사혈 등을 통해서 전염병이 급속하게 번지는 온상지가 되자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 빈에는 16세기 초 11개, 18세기 초엔 7개로 격감하고 프랑크푸르트는 14세기 말에 15개 업소가 성업 중이다가 16세기에 이르러 2개, 1809년 완전히 문을 닫는다.

이때부터는 목욕 대신 향수나 파우더 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세 때에는 한 달에 한번 옷 갈아 입는 것이 다반사였으므로 귀족들이 나쁜 냄새를 향수로 대치하다 보니 향수문화가 발달 했다.

 

최근 유럽에서 한국인을 위해 발행되는 신문에 흥미 있는 기사가 났는데, 다름 아닌 늘 품위 있고 격 있는 미술품만 전시해 오고 있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네덜란드 사창가의 전시를 하고 있다는 뉴스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한 건물을 사창가 그대로 복제한 후 그 안에는 영업했던 여인들을 실제의 인물처럼 석고로 뜬 후 딱 전시 했다.  이 전시장에 많은 관객들이 몰려 오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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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기고한 저자는 독어독문학과를 전공하고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비교문화학·비교종교학 석사, 독일 예나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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